이도일몽

 영진은 눈 앞에 놓인 차를 홀짝 마셨다. 따뜻한 차 덕분에 복잡하던 심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고개를 숙여 검지의 굳은 살을 만지작 거리는 영진의 맞은편으로 긴 코트를 입은 원봉이 와서 앉았다. 영진은 고개를 들고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왔어요?”


 영진의 눈가는 입가와는 달리 분위기가 어두웠다. 원봉의 표정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김구선생은 괜찮습니까?”


 지난 주 남목청에서 총격이 있었다. 이운한이 쏜 총에 임정 인사 여럿이 죽거나 다쳤다. 김구도 중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중이었다.


 “네. 위기는 잘 넘기셨어요.”


 영진은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한 원봉이 물었다.


 “내 제안은 생각해봤습니까?”


 영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영진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먼지가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원봉은 영진의 손을 잡았다. 같은 길을 걸은 뒤로 수도 없이 잡았던 손이었지만, 오늘 원봉의 손은 정말로 간절했다.


 “같이 갑시다. 조선 의용대.”


 좌우합작이 실패한 임정은 또다시 존폐의 위기에 올라있었다. 분열의 상황에서 원봉은 더이상 임정에 기대지 않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가는 길이 달랐다고 생각했던 임정이기에, 아쉬움은 없었으나 영진과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영진은 원봉에게 동지이자 연인이었고,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영진은 간절한 원봉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원봉의 손을 풀었다. 원봉의 가슴에서 무거운 돌덩어리가 쿵 하고 떨어졌다.


 “미안해요.”


 영진의 눈에도 안타까운 물기가 차올랐다. 원봉은 허공을 잡은 손을 거둬들였다. 원봉은 쓰린 마음으로 물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김구 선생때문은 아니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둘은 서로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저는 독립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할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설령 그것이, 지금은 이름밖에 없는 임정일지라도요.”

 “그게 꼭 임정일 필요는 없어요.”

 “정부란 건, 고장났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정부가 삐걱인다고 포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면, 그 정부가 삐걱이면 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겠죠. 그러면 그건 정부가 아니라 다만 단체일 뿐이에요. 정부가 고장이 났으면, 고쳐 써야죠.”


 처음부터 가는 길이 달랐던 사람이었다. 원봉은 그녀의 길을 억지로 꺾을 수도, 그렇다고 그의 길을 꺾을 수도 없었다. 원봉은 그들 스스로가 세운 거대한 신념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상황을 원망하며 꼿꼿했던 고개를 떨어뜨렸다. 동지로, 연인으로, 가족으로 살았던 5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주먹을 쥔 원봉의 손 위로 따뜻한 온기가 올라섰다. 원봉은 고개를 들어 영진을 봤다. 영진은 물기어린 눈가로 원봉을 보고있었다. 영진이 애잔한 미소로 말했다.


 “이도일몽, 가는 길이 달라도 목표가 같으면 동행할 수 있다고 했죠. 가는 길이 달라도 목표가 같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거에요.”

 
 영진의 말에 원봉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웃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그때까지 살아일을지도 모르는 어둠의 시대였기에, 죽는 그 순간까지 놓지 않고 싶은 이 손이었지만, 원봉도 웃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소중한 시간을 쓰라림과 애달픔 속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도일몽...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니라, 같은 길을 걷기 위해 따로 걷는 겁니다.”

 
 영진과 원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영진과 원봉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당신을 믿어요.”

 “당신을 믿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디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한 곳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둘은 굳게 믿었다. 서로의 손을 굳게 잡고, 서로의 눈을 깊이 보고, 서로의 마음을 뜨겁게 끌어안았다.





 -


 검은 구두코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후쿠다는 문을 열어주는 마루와 눈 인사를 하고 마당에 들어섰다. 일군의 명가인 후쿠다 가문의 본가라기엔 오가는 이 없어 썰렁하기만 한 마당이었다. 후쿠다는 돌길을 따라 걷다가 마루에 앉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4년 전 황도파의 실각으로 지위를 잃고 조선땅에서 쫓겨난 히로시는 4년의 세월보다 훨씬 많은 날을 건너 뛴 것처럼 추레하게 늙어있었다. 머리에는 얇은 백발이 가득이었고 눈가는 퀭하니 그늘져있었으며 뺨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있었다. 마당에서 인영을 본 히로시는 누군가를 찾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이니?”


 그러나 그가 찾던 사람이 아닌 것을 확인한 히로시는 다시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찾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지는 않으나 모르는 척 인사한 후쿠다가 마루에 앉았다.


 “본국으로 돌아온지도 몰랐군.”

 “얼마 안 됐습니다.”


  히로시는 텅빈 마당을 내려다봤다. 아무도 없었다.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던 영진은 영 닿지 않을 곳으로 제발로 떠나갔고 사랑하던 아내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남아있던 현옥은 영진이 떠나고 얼마지않아 영진이 있던 곳으로 떠나버렸다.


 “조선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을 보기 어렵다. 내 밑에서 콩고물 하나라도 얻어먹으려고 쓸개라도 빼줄 것 같은 놈들이 내가 실각한 후로는 머리카락 하나 안 비치더군. 덕분에 하루 종일 마루만 지키고 있네. 이렇게 자네가 돌아온 것도 까맣게 모르고 말이야.”


 해가 뜨고 지기만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무력해져버린 히로시를 지켜보던 후쿠다는 마침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 말했다.


 “궁금해하실까봐 들렸습니다. 영진씨는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최근 임정 인사와 같이 목격된 바가 있다고 하니 아직 임정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진의 이름에 히로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히로시의 시선 끝이 마당 한켠에 닿았다. 어린 영진의 자전거 뒤를 잡았던 곳이었다.


 “내 방 한 벽면에 황실과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과 상패가 가득이야. 평생을 황군에 종사해서 그 벽을 가득 메웠지. 영진이의 불미스런 일도 그 명예를 전부 더럽힐 수 없었어.”


 히로시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닿았다. 열살의 영진이 연을 날리던 자리였다.


 “영진이가 내 곁을 떠나갔을 때 뭔가 잘못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벽면에 있는 수많은 훈장과 상패들을 보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군. 그걸 인정하면 그 벽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거니까.”


 히로시는 대문을 돌아봤다. 교복을 입은 영진이 들락날락거리던 곳이었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타버렸어. 그래서 난 죽을 때까지 그 아이를 용서할 수 없을거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을 내내 듣고 있었던 후쿠다는 저물어가는 태양빛이 천천히 물들어가는 마당을 내려다봤다. 후쿠다는, 히로시가 어째서 그 영광스럽다는 상훈이 모셔져있는 방이 아닌, 마루에서 돌아오지 않을 이를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입 바깥으로 내뱉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을 잃고 늙은 노인에게 동정 어린 충고 정도를 건네줄 뿐이었다.


  “원장님은 호랑이 등에 타고 계신게 아닙니다. 단지 원장님이 모는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고 계신 것 뿐이죠. 원장님께서 멈추고 싶으시다면, 다만 페달에서 발을 떼시면 됩니다.”


 후쿠다는 별 말 없이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마당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히로시는 여태껏 그랬듯이, 텅빈 마당을 힘없이 내려볼 뿐이었다.

이몽 (들통나다)

 그날은 평온한 일상 중 하나였다. 두시간 후 그 집안에 두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대면하게 될지는 상상조차 못할, 그런 날이었다. 영진은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었다. 히로시 원장과 현옥 아주머니 사이에서 여느때처럼 깔깔 웃다가, 환자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방에 들어가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근처를 지나가던 영진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마루입니다. 사령관님을 바꿔주십시오.”


 마루의 말에 영진의 등에 섬뜩한 긴장이 섰다. 마루의 목소리가 누구에게 뒤쫓긴 사람처럼 다급했기 때문이었다. 영진은 걸어오는 히로시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그리곤 방에 들어가는 척 귀를 세웠다.


 “뭐? 알았어. 남대문통... 거기 숨어있었군. 바로 가지. 1개 소대를 먼저 보내.”


 대화 내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히로시의 말에 영진은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남대문통이라면 의열단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다. 어쩌다 들킨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을 피신시키는 게 먼저였다. 영진은 군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방에 들어가는 히로시를 확인하고 서둘러 방 안으로 뛰어갔다.


 남장을 하고 플랫 캡을 깊숙이 눌러쓴 영진은 창문을 통해 집을 빠져나와 지름길을 가로질렀다. 중간에 약방에 들려서 전화로 위기를 알릴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전화가 한번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약방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초가를 넘어가며, 주차된 차 지붕 위를 뛰어넘어 영진은 간발의 차로 남대문통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영진은 저녁을 먹으려던 의열단 틈으로 뛰어내렸다. 남자의 형체에서 영진의 얼굴을 발견한 원봉이 반가움에 웃었다.


 “영진씨.”

 “도망쳐요.”


 영진의 짧은 한마디에 분주한 단원들의 몸놀림이 멈췄다.


 “지금 헌병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국을 담은 질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마자르는 무기와 폭탄을 부리나케 챙겼고 남옥은 영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총을 챙겨 문턱에 몸을 숨기며 망을 봤다. 원봉도 남옥과 함께 망을 보려다가 아직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영진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뭐해요, 어서 도망쳐요. 당신, 아직 밀정이잖아.”


 원봉의 말에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이 장독대를 디딤삼아 뛰어오르려는 찰나, 남옥이 소리쳤다.


 “안돼!”


 그 순간, 남옥의 발치에서 나무 파편이 튀기며 총소리가 났다. 원봉은 영진의 팔뚝을 잡아 몸을 숨겼다. 주변을 포위하려던 헌병대의 계획은 남옥의 외침에 놀란 헌병 하나가 총을 쏘면서 실패했다. 물론, 헌병이 총을 쏘지 않았어도 남옥의 매같은 눈이 포위를 눈치챘었겠지만. 원봉은 마자르가 던진 권총 하나를 챙겨 영진에게 쥐여줬다.


 “먼저 가요. 뒷문은 아직 에워싸지 못했습니다.”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은 마당을 쏘아대는 헌병들의 총알을 피해 뒷문으로 달렸다. 마자르와 정임도 뒷문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양장점도 드러났나요?”

 “그것까진 알지 못했어요. 평소에 모이는 곳들은 위험해요. 일단...”


 영진은 짧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고민을 오래 유지하기에는 총소리가 귓가를 쉴 새 없이 때리고 있었다.


 “김단장과 만났던 정자 근처 다리가 있어요. 알아요?”


 정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임은 폭탄과 총기를 챙긴 마자르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밀정인 영진을 보내고 자신은 원봉과 남옥을 기다렸다.


 여름이 아직 먼 늦겨울의 밤이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후였다. 근거지는 포위하지 못했어도 남대문 일대는 통제에 성공했는지 도로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진은 잔뜩 긴장한채 방아쇠를 매만졌다. 그때, 총소리와 함께 영진의 다리 근처에서 성질 모를 것들의 파편이 튀었다. 영진은 재빨리 모서리 뒤로 몸을 피했다. 모서리 너머로 계속해서 총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었다. 영진은 심호흡을 하고 재빠르게 몸을 돌려 적을 겨눴다.


 몇차례의 사격을 했으나 어두운 밤이라 상대는 끄떡없었다. 영진은 다시 모서리 뒤로 숨었다.


 “포기해! 이쪽은 여럿이다!”


 그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모서리 너머에서 들려왔다. 영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자리에서 마주쳐서는 안될 사람이다. 아버지와 딸로, 평화로운 집 안에서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다. 영진은 권총의 남은 총알 수를 셌다.


 히로시는 군의관출신이었기에 분명 뛰어난 사격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령관이 대동할 군인들은 영진보단 총에 익숙한 자들일 것이었다. 영진은 직감했다. 밀정의 역할은 이곳에서 끝났다. 영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아 심호흡을 했다.


 “투항하면 살려준다! 총 버리고 투항해!”


 히로시의 외침에 영진은 자명종 소리라도 들은 듯 눈을 번쩍 떴다. 영진은 다시 적들을 겨눠 총을 쐈다. 이쪽이 수에서 밀릴때 하나 유리한 점은, 영진에겐 과녁이 많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두 어명의 군인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빗발치는 총탄이었다. 그러고보니 왼쪽 팔뚝이 뜨거운 것이, 총알이 스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영진은 등 뒤로 벽이 총알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을 느끼면서도 고민했다. 이 자리에서 버티는 시간이 더 길까, 히로시 앞에 등장하여 그의 발을 붙잡아두는 것이 더 길까. 영진은 후자를 택했다. 영진은 골목길 위로 총을 던졌다. 그제야 일군의 총질이 멈췄다. 영진은 히로시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플랫캡을 벗어던졌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영진은 두 손을 들고 골목으로 나왔다. 인영이 남자의 것이라고 확신했던 히로시는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의아해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달빛 아래 비친 영진의 얼굴에 경악으로 변했다.


 “...ㄴ, 니가 왜 여기에...”


 영진은 대답 없이 천천히 걸었다. 히로시는 단박에 얼어붙었다. 배신감과 분노, 현실도피가 영진의 걸음 하나하나에 히로시의 몸 안을 철저하게 물들였다.


 “말해,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어째서?!”


 더이상 걸을 길이 없는 영진은 히로시의 바로 앞에서 차갑게 말했다.


 “두 눈으로 확인하셨으면서,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영진의 말에 히로시는 이성을 잃고 총을 들어 영진을 겨눴다. 히로시가 진심으로 영진을 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히로시의 가슴에 피가 터지면서 그가 오른 쪽으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썩은 고목나무처럼 쓰러지는 양부를 눈 앞에서 확인한 영진은 방금 전 히로시가 그랬듯이 얼어붙었다. 주변에서 우왕좌왕 총질을 해대던 헌병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양측에서 총알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영진은 그들을 살필 정신이 없었다. 핏물이 잔뜩 물든 황색의 군복을 입은 양부가 발밑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영진은 판단조차 하지 못하고 셔츠 끝을 찢어 상처를 막았다. 히로시는 그런 영진을 노려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모든 헌병들이 쓰러지고 어둠 속에서 원봉과 남옥이 뛰쳐나왔다. 원봉이 상처를 막고있는 영진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영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처를 막는 손이 빠지면 히로시는 죽는다.


 “지금 가야합니다!”


 히로시의 얼굴을 확인한 원봉이 재차 영진의 몸을 일으키려 했다. 영진도 알고 있었다. 가야한다라는 것을. 지금 히로시를 죽이지 않으면 영진이 죽는다는 것을. 그러나 갈 수 없었다. 히로시가 시체가 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영진을 외면하지 못했듯이, 영진도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가세요.”

 “영진씨!”

 “...걱정마요. 꼭, 따라갈게요.”

 “행님!!”


 남옥의 재촉이 들렸지만 원봉은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영진은 그를 보내야했다. 그마저 히로시의 옆에 붙잡아둘 순 없다.


 “가요. 단원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단원들을 거론하자, 그제야 원봉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원봉은 끝까지 영진의 손끝을 놓지 못했다. 영진은 원봉을 향해 애써 웃었다.


 “당신을 믿어요.”


 영진은 원봉의 두 눈을 보며 덧붙였다.


 “나를 믿죠?”

 
 원봉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봉은 영진에게 말했다.


 “꼭... 살아야합니다.”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다짐은 받지 못했다.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봉은 재촉하는 남옥과 함께 골목을 빠져나갔다.



 히로시의 남은 숨이 모두 빠져나가기 전에 일군들이 사령관을 찾아왔다. 누가봐도 독립운동가의 옷차림을 하고 있던 영진에게 총구가 겨눠졌다. 그 중 하나는 경악한채 병원차를 부른 마루의 것이었다. 영진은 온 일군의 경계 속에서 히로시와 함께 병원차에 탔다. 그리고 총독부 병원에 도착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침착한 얼굴로 수술을 집도했다. 같이 수술을 진행한 의료진들 중에서도 가장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의식을 잃은 히로시를 중환자실로 보내고, 영진은 수술 가운을 벗어내렸다. 세탁실로 보내는 가마니에 가운을 집어넣으며, 영진은 이 수술가운이 일본인 의사로 살았던 마지막 흔적임을 알아차렸다.


 영진이 수술실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기댔던 벽면에서 등을 떼고 영진에게 걸어왔다. 가장 선두에 선 두 인물의 표정차이은 너무도 확연했다.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인한 마쓰우라의 환희와 가장 믿었던 사람의 본모습을 확인한 후쿠다의 절망. 영진에게는 둘 중 어느 사람의 표정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나마 후쿠다의 절망보다는 마쓰우라의 환희쪽이 더 낫다고 생각한 영진에게는 감사하게도, 마쓰우라가 후쿠다를 제치고 영진의 앞에 섰다.


 “이영진씨. 의열단의 밀정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의외의 사람이 별다른 대꾸 없이 체포를 받아들이려던 영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직 영진을 히로시의 양딸이자 자신이 보살펴야할 아가씨로 인식하고 있던 마루는 이 체포를 두고볼 수 없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이거 왜 이래. 의열단 체포작전이 히로시 사령관에게 전해졌고 은거지에 있어야할 의열단은 뿔뿔이 흩어졌어. 대신 이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지. 틀림없는 밀정인데, 밀정을 경무국에서 체포하는게 무슨 문제가 되지?”


 그의 말에도 마루가 비켜서지 않자 마쓰우라는 총을 꺼내들어 마루에게 겨눴다. 순식간에 헌병대와 경무국 형사들이 서로를 두고 총구를 맞댔다. 마쓰우라가 비열하게 웃으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가 다치면 헌병대에서 책임질건가. 명분도 없이 용의자를 지키려다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물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은 헌병대였다. 마쓰우라의 말처럼 영진은 의심할바 없는 밀정이었고, 그 혐의를 조금이라고 부인해줄 수 있는 히로시는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있다. 마루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링 위에 두고 싸우고 있는 두 세력 사이에서, 그저 어찌돼든 상관없다는 듯 방관하고 있던 영진은 저항없이 형사들의 체포에 응했다. 비굴함 없이 걸어가는 영진의 뒷모습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빈틈없이 그녀를 지켰던 마루와 후쿠다 두 남자가 힘없이 지켜봤다.


 헌병대의 결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경무국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법무국은 끼어들 틈도 없었다. 히로시가 깨어나기 전에 승부를 봐야했던 경무국 형사들은 고등계 분실에서 강도높은 고문으로 영진을 괴롭혔다. 그 결과로 분실에 들어온지 하루만에 영진의 다리뼈와 갈비뼈 두대가 부러졌다.


 그러나 영진은 비명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왜 그 자리에 있었냐고 묻는 마쓰우라에겐, 아버지의 통화를 엿듣고 걱정이 돼서 따라갔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히로시가 깨어나면 모래성처럼 부서질 대답이었지만, 영진은 히로시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영진의 혐의를 부인할 것이라는데 승부를 걸었다. 그 후에 히로시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거란 건 차후의 문제였다.



-


 며칠이 지났다. 영진에게 버틸 힘이 다 떨어져가던 그 절묘한 순간에 히로시가 눈을 떴다. 마루에게 모든 일을 보고받은 히로시의 대답은 간결했다.


 “데려와.”


 마루는 말을 붙이는 대신 명령을 충실히 행동으로 옮겼다. 한개 소대병력을 가지고 경무국에 들이친 마루는 분실에 갇혀있던 영진을 꺼내왔다. 마쓰우라를 위시한 형사들이 그들 앞을 가로 막았으나 마루는 개의치 않았다.


 “히로시 사령관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을 꺾으려면, 적어도 총독께서 직접 오셔야 할겁니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해!”


 지나가려는 마루의 어깨를 붙잡은 마쓰우라를 마루는 차갑게 응대했다.


 “지금 조선은 사령관님의 세력하에 있습니다. 경부 뿐만 아니라, 이 경무국 전체, 처자의 명운 전체를 걸 수 있겠습니까?”


 마루의 응대에 천하의 마쓰우라 손끝이 빳빳하게 굳었다. 굳어버린 마쓰우라의 팔뚝을 쳐낸 마루는 영진을 데리고 경무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히로시는 눈 앞의 엉망이 된 영진을 마주했다. 부러진 갈비뼈로 인해 호흡이 불안정한 영진에게선 바람이 빠지는 듯한 쇳소리가 났다. 그러나 피와 멍으로 부풀어진 눈꺼풀 아래에는 투사의 눈이 형형했다. 히로시는 너무나도 당당한 영진의 눈빛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일본에서 살았던 시절, 영진이 조선인이라고 학교에서 구타를 당해왔던 적이 있었다. 그 순간 히로시는 두 눈이 뒤집혀 회초리를 꺼내들고 영진을 괴롭힌 여학생들 집으로 뛰어들어갔었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누워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을 마주한 히로시는 경무국에 뛰쳐갈 엄두가 들지 않았다. 영진은 도저히 핍박당하는 이의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로선 처음보는 영진의 눈빛이었다.


 “대체 왜 그랬니.”

 “잃어버렸던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요.”


 영진의 대답에 히로시가 헛웃음쳤다.


 “나라라... 넌 겨우 6년간 조선인이었고 30년동안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왜 없어진 나라의 민족을 자처하는거냐.”

 “명부에 일본인이라고 쓰여졌다고 해서 제가 조선인이란 사실이 바뀌진 않아요. 이 땅의 이름이 잠시 일본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은 여전히 조선인 것처럼요.”


 당돌한 영진의 대답에 히로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난 죽을 운명이었던 널 살려줬어! 내가 어린 널 살리지 않았다면 넌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넌 그 순간부터 일본인으로 태어난거였어!”

 “죽을 운명이요? 그런 건 누가 정하는데요? 당신에겐 내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어요.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이 죽은 것도 운명따위가 아니라 일본의 침략때문이었죠.”

 
 ‘당신’이라고 했다. 히로시는 눈 앞에 있는 영진이 정말로 자신이 딸이라고 믿었던 그 어린 꼬마아이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영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원장님은 어린 절 살렸고, 저는 원장님의 목숨을 구했어요. 그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서 원점으로 되돌아온거죠. 침략자 일본과 피해자 조선으로.”


 둘 사이에 삭막한 적막이 남았다. 그 순간, 히로시는 깨달았다. 이제 그들에게 부녀관계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었다. 히로시는 병원 이불을 주름잡았다. 분노, 실망, 아픔이 동시에 밀려와 히로시의 손등에 굵은 핏대를 세웠다. 히로시는 마지막 경고조로 말했다.


 “널 사랑했다.”


 내내 망설임없던 영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히로시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뭐라 비난하든... 나는 널 내 딸로 사랑했어.”

 “...저도, 원장님을 사랑했다면 믿으실건가요?”


 영진의 한쪽 눈 밑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영진의 눈물과 고백에 히로시의 마음이 덜컥 떨어졌다.


 “제가 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건... 당신이... 내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거였어요.”


 처음 자전거를 배웠을 때 넘어지지 않도록 안장을 잡아준 사람도, 떨리는 마음으로 고등학교 교정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때 손을 잡아준 사람도, 처음 병원에 출근했을 때 새하얀 가운을 손수 입혀준 사람도, 첫 사망자를 허망하게 보냈을 때 병원 구석에 쪼그려앉아 눈물을 쏟아내던 자신의 어깨를 말 없이 토닥여준 사람도 모두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사람이었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악몽으로 물들인 사람이었다. 사랑했던 부모와, 가족같던 친구들을 죽이도록 지시한 사람이었다. 친했던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죽음의 배후에 있던 사람이었다. 조선인의 피맺힌 울음을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영진은 끔찍했다. 눈 앞의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야 할지, 경멸을 느껴야 할지, 분노를 느껴야 할지, 애정을 느껴야 할지 몰아지은 감정의 폭풍은 영진의 가슴을 옥죄였다. 왼쪽 눈을 짓누르는 피멍의 붓기보다 부러진 오른 다리의 고통보다 흉부의 압박으로 숨쉴때마다 폐를 찔러오는 고통보다, 영진은 히로시의 부정을 마주하는 이 감정이 더 아팠다.
 

  방금 전과는 다른 성질의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그들은 그 침묵 속에서 아픔과 슬픔의 이별을 참아냈다. 마침내 히로시는 마루를 불러서 짧게 명령했다.


 “내보내.”


 그것이 끝이었다.




 히로시는 허공을 짚었다. 지난 세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력을 쌓았다. 그리고 그 끝 어드메엔 분명 영진이 있었다. 조선인의 핏줄을 가진 내 아이. 아내에 이어 본인까지 숨을 거두면 천지간에 기댈 곳 하나 없는 불쌍한 아이. 그 아이가 버려질까 두려워 누구도 그 아이를 함부러 대할 수 없는 세력을 쌓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을 거부했다. 아니, 거부로도 모자라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부류를 제일 경멸하고 비난할 단체에 들어갔다. 제 손으로. 히로시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찌 아니 우스운가.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영진은 며칠간 총독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동안 경무국에서 영진을 찾았다. 그것도 켄타가 직접. 그러나 켄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영진이 아니라 히로시였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장 돌려놔!”


 관성의 법칙처럼, 히로시는 아직 영진이 제 유리창을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죽이든 살리든 제 손안에 있어야했다.


 “그 아이는 내가 걱정되서 따라온 것 뿐이야.”

 “이봐, 히로시. 지금 장난해?”

 “지금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나.”


 얼음처럼 서늘한 히로시의 기운에 켄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봐, 켄타. 이 히로시의 딸을 잡아가려면, 그딴 정황증거 말고 빼도박도 못한 물증을 가져와.”

 “자네 정말 왜 이래? 그 아인 밀정이야, 이젠 자네도 알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차갑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히로시의 앞에서 켄타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일본은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법대신 칼과 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있는 건 일본 장성 히로시였고 켄타로선 거기에 맞설 무기가 없었다.


모든 치료를 끝낸 히로시는 황색 군복으로 갈아입으며 환복을 돕던 마루에게 물었다.


 “영진이는?”

 “아가씨께서도 거의 치료가 끝나셨습니다.”


 지난 밤동안 몇번이나 영진을 죽이려는 꿈을 꿨다. 그 수많은 밤동안 히로시는 한번도 영진을 죽이지 못했다.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손은 끝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히로시는 군복의 주름을 펴며 말했다.


 “당장 구라파든, 미국이든 감시자와 같이 영진이 보내.”


 히로시의 명령에 마루가 고개를 들어 히로시를 쳐다봤다. 히로시는 방을 나서기 전에 짧게 말했다.


 “다신 내 눈에 띄지 않게.”


  방을 빠져나가는 히로시의 등 뒤로 마루가 깊숙이 상체를 숙였다.




 그날 오후, 히로시는 보고서 한장을 분노에 차서 잘게 찢었다. 총독부에 정식으로 올라가는 문서는 아니었다. 잘게 찢어진 그 문서에는 정갈한 글씨로, 제물포로 향하던 헌병대 차 하나가 불령선인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적혀있었다.

이몽 경성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육개장에는 고사리며 숙주며 조선땅에서 나는 나물들이 가득했다. 영진은 새빨간 국물을 떴다. 첫 술을 뜨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온 원봉이 미끄러지듯 영진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원봉은 반갑게 웃었다.


 “내가 가도 되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서요. 병원에선 끼니를 제대로 챙기기 쉽지 않아서.”

 “그래서 그렇게 군것질 거리를 좋아했군요.”


 원봉이 놀리듯 말했다. 영진은 그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기고는 다시 육개장 국물을 마셨다. 그리곤 품 속에서 종이 봉투를 꺼내 원봉에게 내밀었다. 원봉은 웃음기를 지우고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영진은 육개장을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얼마 후, 조선 귀족들의 청년 모임이 있어요.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제 아비들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조선을 수탈하는데 혈안이 된 자들이죠.”


 원봉은 겹쳐진 뒷장을 펼쳤다. 참석인 명부였다. 명부를 훑어보던 원봉이 뭔가를 발견하고 영진을 올려봤다. 그것을 알아차린 영진이 말했다.


 “히로시 원장은 조선주둔군 헌병대의 실세에요. 그들은 히로시 원장에게 줄을 대길 원하죠. 그래서 그의 수양딸이자 조선인인 내게 참석을 요청했어요.”

 “위험해요. 그 아수라장에서 당신만 살아남는다면 의심을 받을 겁니다.”

 “물론이에요.”


 영진은 마침내 숟가락을 내려놓고 원봉을 올려봤다.


 “그러니 당신은 나도 쏴야해요.”

 “그게 무슨...! 말도 안돼요!”

 “경계가 삼엄할 거에요. 내부에서 돕는 자가 없으면 거사가 힘들어요.”

 “그렇다고 당신을 쏘라고...?! 안돼요. 차라리 거사를 마치고 같이 상해로 갑시다.”


 원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영진은 흔들림이 없었다.


 “임정에는 아직 일제의 고위층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해요.”


영진은 자신을 보고있는 원봉의 봉투를 쥔 손을 감쌌다.


 “난 아직 밀정이에요.”


 들키지 않았으니 영진은 밀정이었다. 영진은 원봉의 손을 자신의 가슴쪽으로 가져왔다. 원봉의 검지를 잡고 자신의 쇄골 밑을 짚었다. 장기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조금이라도 빗겨가면 치명상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정확히 쏘세요.”

 “...당신이 죽을 수도 있어.”


 영진은 훗 하고 웃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영진은 원봉의 손가락을 펴서 자신의 쇄골 밑에 올려놓고 제 손을 덮었다.


 “당신을 믿어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시대라더니.”


 원봉도 영진을 따라 어쩔 수 없이 웃었다.


 “당신을 믿는 건 밀정 이영진이 아니라, 사람 이영진이에요.”


영진은 원봉의 손을 모아 주먹을 쥐었다. 영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후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당신을 믿어요.”


 원봉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싸움이다. 살아남기 위해 의심해야 하고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믿어야 하는 어려운 시대의 어려운 싸움이었다.




 십여 명 되는 귀족 청년들은 파티 내내 영진의 눈에 들기 위해 그녀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라를 배신한 자들은 그들이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자들의 묘한 경멸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인 양부를 둔 영진에게 더욱 잘 보이려 했다. 조선인이지만 일본인의 자식으로 자란 영진은 그들에게 일본인 사회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였다. 영진이 일본인 사회에서 서얼취급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했다. 영진은 파리떼같은 귀족들을 떼어내고 은밀히 바깥 난간으로 나갔다. 바깥 난간에는 귀족들의 경호원으로 위장한 원봉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진이 원봉에게 말을 걸려던 순간, 안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원봉은 기민하게 영진을 감싸 그림자가 진 곳으로 피했다. 귀족 사내 하나가 안주머니에서 궐련 하나를 꺼내 입술에 물었다. 파티 내내 영진 곁에 붙어서 아부를 떨던 자였다.


 “젠장, 부대껴서 더이상은 못하겠네.”


 같이 나온 귀족 사내가 안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켜서 마주선 사내의 궐련에 불을 붙이고 자신의 궐련에도 불을 붙였다.


 “어쩌겠냐. 총독부 부원장이라는데.”

 “내가 하긴 하는데 말이야. 솔직히 이게 말이 되냐? 우리는 아버지들이 공덕을 쌓아 명예와 작위를 이어받았는데, 그 기집애는 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양부 하나 잘 잡아서 총독부 부원장이나 하고 있잖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원.”

 “하기야 말이야. 반세기만 먼저 태어나도 양반가 밑에서 종살이나 하고 살았을 년놈들이 요즘에야 아득바득 공부해서 인텔리니 뭐니 해서 우리 귀족들 욕을 하고 있으니, 그 놈들 참 세상 잘 타고 나지 않았냐?”


 귀족은 키득키득 웃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원봉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진이 원봉의 주먹을 붙잡았다. 십년을 넘게 들어왔던 소리였기에 영진은 지나가다 돌 밟은 듯 덤덤했다. 궐련을 다 태운 귀족 사내들이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자 원봉은 조심스레 창문을 잠갔다.


 “지하 일층에 술창고가 있어요. 오른쪽 세번째 줄 가장 윗 상자 안쪽에 폭탄과 총기를 숨겨놨어요. 다른 단원들은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자리라 위장하여 잠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몸수색이 삼엄하여 총기를 반입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영진의 참석이 불가피했을 뿐이었다. 사교장에서 금품이 오가는 것이 놀라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경호원들도 참석자인 영진의 짐은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주는 주방에 있고 남옥이는 웨이터로 위장해서 세주와 같이 있습니다. 정임이도 종업원으로 위장해있습니다. 다들 시간이 되면 지하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원봉의 대답에 영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아세웠다. 그때, 원봉이 돌아가는 영진의 팔뚝을 잡았다. 영진의 몸이 반동을 타고 원봉을 돌아봤다. 원봉은 긴장에 적셔진 눈동자로 영진을 비쳤다.


 “걱정하지 마요. 절대... 놓치지 않을겁니다.”


 영진이 묘하게 떠는 원봉의 손끝을 잡아 다독였다. 영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안해요. 당신을 믿어요.”


 영진은 원봉의 손을 놓고 파티장에 돌아갔다. 쌀쌀한 바람이 지나간 난간에서 두려움에 턱을 떨던 원봉은 긴장감에 숨을 몰아쉬고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투사의 눈으로 돌아온 원봉은 성큼성큼 걸었다.



 피가 사방에 튀고 비명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파티장에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오른 뺨에 튄 핏방울을 손바닥으로 쓸어닦은 원봉이 피아노 밑에 숨어 덜덜 떨던 귀족 하나를 발견했다. 방금 전 바깥 난간에서 영진을 욕하던 귀족 청년 중 하나였다. 원봉은 피식 웃었다. 피에 잔뜩 젖은 머리칼을 쓸은 원봉은 총알을 재장전하고 몸을 수그려 귀족 청년을 향해 총을 겨눴다. 자신을 겨눈 총을 발견한 귀족 청년은 겁에 질려 뒤로 넘어졌다.


 “세상 잘 타고 난 나리, 조상 공덕 덕분이라 생각하시오.”


 탕!


 이마 정가운데 총알이 박힌 청년은 외마디 비명도 없이 무너졌다. 몸을 일으킨 원봉은 몸을 돌리다가 멈췄다. 상대편 기둥 아래 피에 젖은 정장 차림의 영진이 그의 시선 끝에 닿았다. 영진과 원봉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총을 맞은 이들 중에서 살아남는 자가 생길지도 모른다. 목격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영진은 총을 맞는 순간까지 일제의 부역자여야했다. 원봉은 떨려오는 오른 손을 들었다. 그 손에 들린 무거운 총신을 왼손으로 받쳤다. 원봉을 발견하고 달려오던 남옥은 영진 역시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 일만은 자신이 직접 해낼거 라했던 원봉의 결심때문이었다. 원봉은 영진을 향해 총을 겨눴다.


 “민족의 반역자! 나라를 판 부왜인! 의열단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처단한다!”


 손 끝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원봉은 총신을 고쳐잡았다. 영진을 살리기 위해서 원봉은 영진을 놓치지 않았다. 원봉의 총끝에서 영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믿어요.’


 원봉은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를 떠난 총알은 망설임없이 공기를 가르고 영진의 쇄골 밑에 박혔다. 충격으로 영진의 입이 벌어지고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렸다. 영진의 뺨에도 핏물이 튀었지만 영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축축하고 뜨뜻한 소름끼치는 기분이 가슴 위에서부터 빠르게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임무 중에 다리에 총을 맞아본 적이 있는데, 그때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인 느낌이었다. 숨이 가쁘게 쉬어졌다. 아니, 잘 쉬어지지도 않았다. 아니, 숨을 쉴 수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되자, 영진은 마침내 고통을 끝내고 정신을 잃을 수 있었다.


영진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지자 원봉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행님!!”


 그때, 남옥이 떠나려는 원봉의 정신을 붙잡아줬다. 원봉이 남옥을 돌아봤다. 남옥은 고개를 저었다. 이 순간 원봉이 영진을 붙잡으면 영진의 희생이 무로 돌아간다. 원봉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분한 마음만큼 원봉의 송곳니가 입술에 깊이 박혔다. 원봉은 부왜인의 피가 섞인 자신의 피를 쓸어내리고 남옥을 따라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


파티장에서 살아남은 운 좋은 사람들이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원봉은 진국빈의 모습으로 총독부 병원으로 걸어들어갔다. 총독부 병원은 분주했다. 자식을 맡긴 귀족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 문턱을 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몰라서 항상 경호원들으루대동하고 다녔기에 귀빈실 근처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분주한 환경이 원봉에겐 다행이었다. 별다른 제지없이 영진의 병실 앞에 도착한 원봉은 마음을 가다듬고 병실문을 두드렸다.


 방문을 연 자는 젊은 장교였다.


 총독부 원장으로 하루가 바쁜 히로시는 영진의 옆을 24시간 지키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기에 마루를 보냈다.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는 명령을 마루는 누구보다 충실히 수행했다. 마루는 눈 앞에 나타난 낯선 이를 경계심을 잔뜩 담은 눈으로 바라봤다.


 “누구시죠?”

 “진국빈씨?”


 그때, 병실 안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진의 옆에 앉아있던 초췌한 얼굴의 후쿠다가 보였다. 후쿠다의 아는 척에 마루가 경계를 늦추고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로 원봉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vip병실 한 가운데에는 따뜻한 느낌이 드는 갈색 침대가 놓여있었고, 침대 위의 이불 아래로 창백한 얼굴의 영진이 누워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새하얀 얼굴빛에 원봉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영진씨를 보러 오셨군요.”

 “예... 상태는 어떻습니까?”


 적진 한복판에 들어온 원봉은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후쿠다에게 물었다. 후쿠다는 힘든 미소로 대답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다는군요. 다만 피를 많이 흘려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봉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봉은 후쿠다의 맞은편으로 가서 영진의 옆에 앉았다. 원봉은 따뜻하고 하얀 영진의 손마디를 쥐었다. 영진을 내려다보고 있는 원봉의 얼굴을 본 후쿠다는 뭔가를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후쿠다는 원봉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원봉의 마음이 그와 같다면 둘만의 시간을 내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후쿠다는 마뜩찮아하는 마루의 등을 떠밀어 병실을 나갔다.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은 병실에서 원봉과 영진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봉은 영진의 손을 더 깊게, 강하게 잡았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의 굳은 살이 원봉의 굳은살과 맞닿았다.


 뚝.


 하얀 침대 시트 위로 올망진 눈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원봉의 눈에서 나와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었다. 죽은 듯 누워있는 영진의 얼굴 위로 그녀와 겪었던 수많은 시간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가로등 불빛을 피해 숨어들어간 첫만남의 골목. 두달 여간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던 상해의 거리. 가까스로 청방으로부터 위협에서 벗어나 돌아오던 차안. 물먹은 솜처럼 피로에 젖은 몸으로 알코올 솜을 들어 상처를 닦아주던 여관방. 한치 부끄럼, 두려움도 없이 총구에 맞서던 북만주의 마당. 처음으로 티없이 맑은 웃음을 보여주던 만주역의 기찻길.


 누구보다 당당하게, 누구보다 거짓없이, 동지의 총알에 운명을 맡기는 당신이 서있던 파티장.


 “그 어느 순간에도 당신은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약한 모습 보이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일제가 최대의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로 조선땅의 산천초목을 덜덜 떨게 만들었던 의열단장 김원봉이 침대에 누워 의식을 잃은 여자의 손을 잡고 벌벌 떨었다. 그녀가 죽지 않을 것을 알고도, 눈 앞에 있는 이 깡마른 여자가 영영 깨어나지 않을까봐, 자신을 떠나가버릴까봐 두려웠다.


 원봉의 떨림은 잔뜩 가라앉았던 영진의 심장을 두드렸다. 영영 감겨버릴 듯 했던 영진의 무거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조용히 숨겨진 눈동자를 드러냈다. 영진을 응시하고 있던 원봉의 눈물진 눈가가 동그랗게 펼쳐졌다. 원봉은 놀라 영진에게로 상체를 수그렸다.


 “이영진씨, 내가 보입니까?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


 영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봉의 목울대 밑에서 안도의 숨이 터져나왔다. 영진이 손에 힘을 실어 원봉의 주의를 끌었다. 원봉이 영진의 얼굴을 올려봤다.


 처음으로 죽음이란 걸 피부로 느껴봤다. 그제야 영진은 깨달았다. 오늘의 생사가 내일의 생사를 장담해주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오늘의 기쁨이 내일의 슬픔으로 변모할지 모르는 시대이지만, 내일을 장담할 수 없기에 더더욱 오늘을 기쁘게 살아야하는 것이 지금 영진이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영진은 이틀간 물 한모금 넘기지 못해 잔뜩 마른 입으로 힘겹게 소리내어 말했다.


 “사랑해요.”


 발음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목소리였지만 원봉의 짐승같은 육감은 주인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꼽까지 떨어졌던 원봉의 가슴이 어깨뼈를 칠듯이 튀어올랐다. 원봉은 살아남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원봉의 입술이 영진의 입술 위로 겹쳐졌다. 이틀간 병원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한 영진의 입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묘한 벚꽃향이 났다. 그때까지 원봉의 속눈썹에 매달려있던 굵은 눈물은 마침내 영진의 위에서 떨어져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가 영진의 베갯잇을 적셨다.

이몽 북만주(2)

   닭똥이 섞인 볏짚을 옆으로 밀어넣고, 마자르가 숨겨진 나무상자를 꺼내 마루에 내려놓았다. 묵직하게 나무 으깨지는 소리가 내용물의 성질을 짐작할 수 있게했다. 안에는 반짝이는 금붙이가 가득이었다. 금괴에서 빛나는 조국의 미래를 넘겨짚는 대신에, 영진은 만주에 남겨질 태준의 딸아이를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그때, 철컥이는 소리가 귀 뒤에서 들렸다. 영진은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눈 앞에 동그란 총구를 내밀고 있는 이는 원봉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혼돈과 당황스러움으로 가득찼다. 남옥은 복잡한 심사를 제쳐두고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영진에게 겨눴다. 승진이 당황과 분노로 총구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영진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무슨 짓입니까?!”


 승진의 외침에도 원봉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는 당신 정체를 알아야겠습니다. 당신은 관동군 주둔지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사람에게 총을 쐈어요. 그건 절대로 사냥만으로 총을 쏴본 자가 할 수 있는게 아니야. 당신은 이전에도 사람에게 총을 쏴본 적이 있는 겁니다.”

 “확실해질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하지만 이제 기다릴 수 없어요. 당신이 조국독립에 해가 되는 존재라면, 당신의 손에 코민테른 자금이 들어가게 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해요. 당신, 누굽니까?”

“총으론 내게 대답을 들을 수 없어요. 이미 한번 경험해봤을텐데.”


 영진은 말하며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총구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에 남옥은 되려 당황해서 총구가 흔들렸지만 원봉은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했다.


 “이건 협박도 아니고 경고도 아니야. 이번엔 정말로, 당길겁니다.”


 원봉은 도리어 한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덕분에 총구와 영진은 더 가까워졌다. 이제 총구와 영진 사이 주먹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 할정도로 가까웠다.


 “코민테른 자금, 이건 그냥 돈이 아닙니다. 이 돈이 일제의 손에 들어가면 일본의 군자금으로 쓰이겠지. 동지를 죽이는 총알을 사고, 대한의 땅을 짓밟은 탱크를 사고! 우리가 온 후 유태준 선생이 죽었어. 내겐, 우리에겐! 유태준 선생의 자금이 올바르게 쓰이게할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말해요, 당신 누구야!”

 “김구의 밀정, 파랑새.”


 너무나 단숨에 스스로 밝히는 영진의 정체에 원봉은 영진의 말을 잡아채지 못했다.


 “뭐?”

 “김구의 밀정이 경성에 있다. 조선인 여의사, 그게 바로 나라구요. 이영진.”


 영진을 그저 태준의 지인으로만 알았던 승진도, 영진을 총구로 겨누고 있던 남옥도 입이 떡 벌어졌다. 김구의 밀정을 김에스더로 알고 있었던 원봉도 자신의 귀를 의심하긴 마찬가지였다.


 “똑바로 말해요. 어느 소속의 무슨 지위입니까.”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뭐라구?”

 “내가 이 총이 무서워서 정체를 밝혔다고 생각해요?”


 영진은 총신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이번에는 원봉도 정말로 당황했다. 그러나 영진은 거침이 없었다.


 “내게도, 아니, 임정에도 코민테른 자금은 필요해요. 내가 정체를 밝힌 이유는 코민테른 자금을 가져가기 위함이라구요. 김구 선생의 밀정이란 것 이상은 밝힐 수 없어요. 내게도 내 조직을 보호할 책임이란 게 있어요.”


 이번에는 남옥이 빈정이 상해 나섰다.


 “우리가 못미더운 겁니까?”


 영진은 남옥을 돌아봤다.


 “어떻게 믿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되는 시대인데.”

 “우리 행님은 약산 김원봉이야! 의열단장 김원봉!”

 “내겐 약산 김원봉의 이름보다 내 조직의 안위가 더 중요해요!”


 영진은 원봉에게 그랬듯이 남옥에게도 결코 지지 않았다. 영진의 기세에 남옥이 할말을 잃자 영진은 원봉을 돌아봤다.


 “내 정체가 궁금하면, 김구 선생에게 물어봐요. 그 분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내 정체를 알 수 없을 거에요. 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쏘시던지.”


 영진은 총신을 밀어 쳐냈다. 그녀는 원봉을 지나쳐 걸어 멀리 도망가있던 태준의 딸에게 걸어갔다. 어른들의 마찰에 두려워 떨고 있던 태준의 딸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있던 원봉은 총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기세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던 원봉이 그녀의 앞에서면 번번이 지고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총신을 집어넣고 자금을 챙긴 뒤에도 한참 후였다.





 눈이 내리는 만주역 앞. 검은 그림자 수 개가 역 앞을 서성였다. 영진도 그들 사이에서 묵묵히 추위를 참아가며 열차를 기다렸다. 그 옆으로 크고 높은 그림자가 와서 섰다. 영진의 옆에 서있던 마자르는 원봉의 눈치에 쭈뼛쭈뼛 뒷걸음질로 남옥의 곁에 걸어갔다. 원봉의 기척에 영진이 그를 돌아봤다. 추위에 하얗게 질린 영진의 얼굴에 볼만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자금은 김구 선생께 잘 전해주겠습니다.”

 “고마워요. 상해까지 들려야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말랑말랑한 대화가 오갔음에도 남은 공기는 서먹서먹했다. 원봉은 목구멍 아래에서 간질거리는 민망함에 애꿎은 턱밑만 벅벅 긁다 손을 내렸다.


 “흠흠!”


 원봉의 헛기침에 영진도 다시 원봉을 돌아봤다.


 “유태준 선생의 집 앞에서 총 들이댄 거... 미안합니다.”


 무뚝뚝한 원봉의 입에서 나온 사과에 영진은 대꾸도 못하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영진은 풋 하고 웃었다. 그녀의 뒤를 쫓을때 종종 봤던 웃음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이는 처음이었다. 원봉의 얼굴이 단번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오, 왜 웃습니까?”

 “그쪽이 날 죽이려던게 한두번이에요? 왜 그것만 사과하세요?”

 “그, 그건...”


 원봉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자 영진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추측하는 척 장난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때는 정말 죽이려고 해서?”


 원봉은 대답하지 못했다. 영진도, 원봉도 알고 있었다. 그 순간엔 영진의 답이 아니었다면 원봉은 정말로 영진을 죽였을 것이다. 원봉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 돈은 많은 독립투사들이 피땀을 흘려 얻어낸 자금입니다. 나는... 그 신념들을 배신할 권리가 없어요.”


 미안하고 어쩔 수 없는 마음에 눈을 내리깐 원봉의 얼굴을 본 영진은 쓰게 웃었다. 원봉 뿐만 아니다. 영진 역시 원봉의 상황이었다면 총을 겨눴을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눈치챈 지금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마음이 가는 사람도 총을 겨눌 수 있어야 하는 비극적인 시대가 지금의 시대이다. 그이에게 이끌리는 자력에 몸을 맡기기 전에 시험하고,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는 곳이 지금의 조선이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내게 총을 겨눈건 당신이 아니니까.”


 영진의 말에 원봉이 영진과 눈을 마주쳤다. 영진은 원봉을 이해했다.


 “내게 총을 겨눈건 시대에요.”


 영진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원봉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진이 먼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시대지만, 오늘도 살아가야 하니까.”


 원봉은 영진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봤다. 원봉은 영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악수 대신 원봉은 영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덕분에 영진은 예상치 못하게 원봉의 품으로 안길뻔 했다. 원봉이 직전에 영진의 몸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영진은 자연스레 원봉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원봉은 영진의 귀 바로 옆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원봉은 영진의 상체에서 떨어져 깊게 웃었다. 영진의 웃음이 달밤에 피는 벗꽃같다면, 원봉의 웃음은 그 벗꽃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같았다. 바로 눈 앞에서 깊어져가는 원봉의 웃음에 영진도 화답하듯 활짝 미소를 피었다.


 “경성에서 다시 봐요.”


 영진이 짧게 말했다.


 소복 소복 쌓여가는 눈송이 사이로, 원봉은 근원모를 꽃향기를 맡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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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봉은 플랫 캡을 깊이 눌러 썼다. 희뿌연 얼룩이 진 오래된 거울이었지만 원봉의 얼굴을 비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때 문을 열고 남옥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옥의 손에는 종이 네 장이 들려있었다.


 “받아왔니.”


 원봉의 물음에 남옥은 기차표 네장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모두 상해에서 만주로 가는 기차표였다. 원봉이 기차표를 본 것을 확인한 남옥이 방 안 기둥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 여자랑 같이 가도 되겠나? 일본 놈들 밀정일지도 모른다면서.”

 “아니야. 그런거.”


 원봉이 탁자에 놓인 기차표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청방에 붙잡혀있을때 내 이름을 알았어. 그런데도 일제에 말하지 않았다.”

 “여는 상해 아이가. 청방이 사방에서 눈 밝히고 있는데 우예 행님을 잡아가겠노. 경성에서 밀고할 수도 있다.”


 남옥의 말에 총을 챙기는 원봉의 손이 멈칫거렸다. 원봉의 등을 지켜보고 있던 남옥은 가슴 한구석에 잔뜩 엉켜있는 위화감이 몹시나 불편했다. 이영진이 얽힌 문제에 유독 주저하는 것 같고, 망설이는 것 같고, 고민하는 것 같은 원봉의 모습은 여태껏 남옥이 알고일던 원봉의 것이 아니었다.


 “행님.”


 남옥이 넌지시 원봉을 불렀다. 원봉이 고개를 돌려 남옥을 봤다. 남옥은 검지로 모자에 눌려있던 이마를 긁적긁적 긁으며 말했다.


 “내는 행님이 얼른 결혼했으면 좋겠다.”

 “무슨 소리야? 생뚱맞게.”

 “행님도 어딘가에는 편안하게 마음 둘 구석이 있어야하지 않겠나.”


 간지러운 소리를 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남옥을 원봉은 가만히 지켜봤다.


 “형수님은 우리처럼 독립운동같은 것도 안했으면 좋겠고, 사상같은 거에 얽매이는 사람도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뭐 행님이 선택한 여자라면 우야겠노.”

 “자꾸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 할래? 본론부터 말해.”

 “일제 부역자는 아니다.”


 더이상 남옥은 간지럽고 민망한 표정도, 장난기어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남옥은 경고를 섞은 단호한 눈빛이었다. 원봉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이영진, 그 여자... 일제의 밀정일 수도 있고, 일제의 부역자일 수도 있다. 행님, 그 여자 가까이 하지 마라.”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마라.”

 “행님. 내가 행님 대신 죽어줄 수도 있고, 행님 대신 누군가를 죽여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행님을 쏘는 건, 싫다.”


 남옥의 말이 끝나자 원봉은 저벅저벅 걸어 남옥의 곁으로 갔다. 그는 두꺼운 외투 위로 남옥의 윗가슴을 툭툭쳤다.


 “그럴 일 없어. 네가 나 대신 죽을 일도, 나 대신 죽일 일도, 나를 쏠 일도.”


 짧게 남옥을 내려본 원봉은 남옥을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갔다. 남겨진 남옥은 다시 이마를 긁적이고 짧은 한숨을 내뱉은 후 원봉을 따라 방을 나갔다.




 -



 만주에 간 영진은 태준에게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년 전 독립운동을 시작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임정에 연결시켜준 자가 바로 태준이었기때문이었다. 태준은 모닥불에 데운 아이락을 영진에게 내밀었다.


 “몽골에 있을 때 배운거야. 먹어봐.”


 영진은 아이락을 받아들고 홀짝였다. 시큼한 맛에 영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영진의 표정을 본 태준이 하하 웃었다. 영진에게 남은 아이락을 받아들고 황차를 내민 태준이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김단장은 네 정체에 대해 모르는 것 같던데.”

 “밀정의 정체는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죠.”

 “사실 얼마 못가서 포기할 줄 알았어. 넌 다른 동기들과는 다르게 가진게 많았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니라는 걸 알았죠. 선배들 덕분에.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히로시 소장이 만들어준 것이었어요. 히로시 소장이 날 파양하겠다고 말하면 하루 아침에라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겠죠. 처음부터 내가 가진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눈빛이... 강해졌다.”


 모닥불을 비춘 영진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태준이 말했다. 영진은 태준을 돌아봤다.


 “좋아보이나요?”

 “...모르겠다. 우리의 땅이 우리의 것이었더라면, 너는 그런 눈빛을 갖지 않아도 됐겠지. 네가 투사의 눈빛을 갖게 된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좋아보이든, 나빠보이든 내 선택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던 의사시절로 돌아가는 건 끔찍해요.”


 가만히 보던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영진이 태준에게 말을 걸 차례였다.


 “만주는 위험해요. 상해로 가요. 임정에서 선배의 식구들을 보호할 거에요.”

 “만주에는 아직 치료가 필요한 조선인들이 남아있어.”

 “선배가 코민테른 자금을 맡고 있다는 걸 알아요.”


 알려질대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구 선생을 만나보세요. 선생은 선배를 통해 자금을 분배하고 단체들간의 반목을 해소할 생각을 하고 계세요.”


 영진의 말에 태준은 고민에 잠겼다. 영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조선은 힘이 약해요. 그런 조선이 일본에 맞서 싸우려면 하나된 마음이 필요해요. 사분오열 흩어져서는 무엇도 할 수 없어요.”

 
 태준은 고개를 숙여 손에 쥔 아이락을 내려다봤다. 내내 엉켜왔던 머리 속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두 눈을 감고 고민에 빠져있던 태준의 손에 갑자기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태준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체온의 주인을 돌아봤다.


 “김구 선생과 약속했어요. 무력으로 자금을 빼앗는 일도, 독자적인 자금집행도 없을거에요.”

 “...영진아.”

 “이년 전, 내가 선배를 믿었듯이 선배도 나를 믿어줘요.”


 이년 전보다 훌쩍 커버린 눈빛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영진을 보고, 태준은 복잡해진 마음을 숨기며 차분한 미소로 영진의 손을 고쳐잡았다. 영진의 손을 재차 토닥인 태준은 말없이 일어나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영진은 태준의 빈 자리만 내려다보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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