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 프롤로그 기타

1930년, 경성 자혜병원 앞뜰에도 찬란한 봄꽃이 피었다. 푸르른 나뭇잎들 사이로 뽀얗게 올라오는 하얀 꽃잎들 아래로 바람을 쐬는 영진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순백의 미소를 품은 얼굴의 그녀는 총독부 부원장 히로시 슌의 양녀였다. 유서깊은 군인집안 출신인 그를 양부로 둔 덕분에 영진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미소처럼 때묻지 않고 새하얀 꽃길만 걸어 의사가 되었다. 어린 시절 겪었던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기억은 영진에겐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악몽은 이따금씩 찾아와 여름날의 날파리처럼 영진을 괴롭히곤 했지만 말그대로 날파리만큼의 소요뿐인지라 안온한 일상을 망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영진은 일본인이었다. 경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에게 조선이란 흔적은 단지 그녀가 밟고 있는 이 땅과 그녀의 이름뿐이었다. 영진에게 이름은 차가운 땅 속에 묻힌 생부와 생모를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연결고리, 그뿐이었다.


양부가 의사였고, 양부의 직장이 병원이었던 탓에 영진은 훌륭한 의사로 자라날 수 있었다. 동경에서 그녀를 가르친 모든 의사들이 양부의 친구이거나 선후배였고 그녀의 집에는 참고할만 의학서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녀의 집에는 누구보다 뛰어난 선생님이 항상 상주해있었다. 영진은 자혜병원의 어느 의사보다도 뛰어난 수술실력과 의학지식을 자랑하는 외과의였다.


그 실력때문에 오늘도 영진은 벗꽃나무 아래에서 오래 여유를 즐길 수 없었다. 지금 막 들어온 환자가 엄청난 복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간호사 하나가 창문 아래로 영진의 이름을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영진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환자를 위해 달렸다. 영진은 의사였다. 비록 의사의 길을 걷게 된 데에 타의가 반절이었으나, 나머지 반절는 분명 자의가 섞인, 영진은 의사였다.




장시간에 걸친 수술을 끝내고 피가 튄 수술복을 벗어낸 영진은 다시 새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집무실에 돌아왔다. 환자에 집중하느라 공복을 유지한 탓에 허기가 극심했다. 간호사가 준비해둔 단팥빵두개가 우유 한잔과 함께 탁자 위에 있었다. 왼손으로 단팥빵을 들어 입에 물고 우유를 마시려던 영진은 갑작스러운 굉음에 깜짝 놀라 입에 물었던 빵쪼가리를 떨어뜨렸다. 지붕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부서져 떨어졌다. 동경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영진은 재빨리 책상 밑에 숨었다. 그리자 떠올랐다. 이곳은 동경이 아니라 경성이라는 것을. 경성에는 지진이 잦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영진은 머리 위에 앉은 시멘트 가루를 털어내고 책상 바깥으로 나왔다. 하얀 가운 위에도 가루가 자욱했다. 그때 문을 열고 준수가 들어왔다. 준수 역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야?”

“지금 병원에서... 폭탄이 터졌어요.”


병원과 폭탄.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였다. 영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폭탄?”

“예. 귀빈실에 있는 정무총감 방에서 폭탄이 터졌답니다.”

“폭탄...? 병원에서?”

“예.”

“그래서, 환자는?”

“예?”

“환자는 어떻게 됐냐고?!”


불벼락같은 영진의 호통에 준수가 자동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예, 다행히 환자는 복도에서 운동중이라 몸을 피했답니다. 병실에는 아무도 없어서 피해자는 없대요.”

“다행이네.”


영진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영진은 화가 났다. 독립운동가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 역시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곳은 병원이다. 병원에서는 국가도, 정치도, 이념도 없다. 오로지 환자와 의료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병원 내부에서 폭탄이라니, 영진은 장소 불문한 독립운동가의 무례에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정무총감은 일본의 고위 관료였다. 총독부 병원장과 함께 자혜병원을 찾은 히로시는 총독부 병원으로 돌아가기전 영진을 찾았다.


“놀라진 않았니?”

“예, 저는 괜찮아요.”


양손으로 온순한 미소로 답하는 영진의 어깨를 쓸은 히로시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조만간 경무국에서 찾아갈거다. 너무 놀라진 말고.”

“네?”

“이번 사건은 경무국에서 맡았다. 총독이 경무국 손을 들어줬어. 널 참고인으로 부를거다.”

“예? 하지만, 제가 왜...”

“......조선인 환자, 의료진 모두 조사대상이다.”


히로시는 그 ‘조선인’에 영진도 포함된 것이 매우 불쾌하다는 듯 잇새를 깨물었다. 히로시는 정말로 영진은 제 피가 섞인 친딸처럼 여겼지만 때로 이렇게 영진은 조선인으로, 자신은 일본인으로 구분짓는 현실 앞에는 미칠 듯이 무력했다. 영진 역시 늘 이따금씩 문을 두드리며 찾아오는 조선이라는 정체성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겪어왔던 일인지라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잘 처신할게요.”

“...그래.”


히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장군모 밑으로 얼굴에 그늘진 비통은 숨기지 못했다. 히로시는 이제는 완벽히 성장한 딸아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이 아이의 친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이 아이의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토록 미안해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영진은 맞은 편에 앉아있는 피의자를 보고 경악했다. 영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의사였다. 일본인 고위 관료의 양아들이었던 그는 영진과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피를 가진 일본인이었다. 같은 처지라서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했던, 누구보다 친밀했던 세브란스 대학의 선배였다.


“선배가 어떻게...”


잡혀온 후에 당한 고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그의 얼굴은 처참했다. 눈두덩이는 찢어져 피가 멈추지 않았고 뺨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묶여있는 두 손의 열손가락 중 두 세개는 비정상적으로 꺾여있었다. 그러나 그는 피가 섞인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글쎄... 나는 너와 다르기 때문이겠지.”


그는 꺾인 한 손가락을 살짝 들어 말했다.


“토우야 국장이 이런거야.”

“선배...”


토우야 국장이 그의 양부였다. 영진은 다행히 양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모든 조선인 양자 양녀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거의 모든 양자와 양녀들은 그저 일본의 선전도구일 뿐이었고 딱 그정도로만 대접받았다.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게 되면 일본인 양부모는 가차없이 그들을 버렸다.


“토우야 국장에게 난 일본의 자비를 보여줄 인형일 뿐이었던 거지. 내선일체, 일선동조? 모두 허울좋은 미명일뿐이야. 이것봐, 이런 일이 터지면 가장 먼저 의심받게 되는 것도 조선인이잖아. 일본에게 조선은 식민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죽지않을만큼만 억압하고, 봉기하지 않을 정도로만 내어주고.”

“하지만 선배, 선배는 의사에요. 그곳은 선배가 일하던 병원이라구요. 환자가 다칠 수도 있었어요. 무고한 의료진이 다칠 수도 있었다구요.”


영진의 말에 한점 부끄럼 없이 또렷했던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숨어서 독립운동을 했지만 천생 의사로 살아온 그는 표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그 숨겨진 표정을 영진은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선배, 이 폭탄... 선배가 한 거 맞아요?”

“......맞아.”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영진을 다시 응시하고 말했다.


“정무총감이 그 병실에 입원해있다는 걸 알린 것도, 뒤늦게 알고 사람들을 대피시킨 것도 나니까, 나도 도운 셈이지.”


영진은 경악했다. 그러니까 그는 폭탄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뿐 설치한 것은 다른 사람이란 것이었다.


“선배...! 왜 말하지 않았어요?”

“무엇을?”


그의 당당한 되물음에 오히려 영진의 말문이 막혔다.


“내가 폭탄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니면, 폭탄을 설치한 내 동지를?”

“......”

“나는 잡혔고, 그는 잡히지 않았어. 그것만으로도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이유는 충분해.”

“하지만 선배... 그러다 선배가 죽을 수도 있어요. 몰라요? 1909년에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도 그렇게 죽었어요.”


영진의 말에 그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턱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렇게 된다한들 난 말 못해. 그동안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전부 누군가의 침묵덕분이었는걸.”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에요?! 비록 토우야 국장이 선배를 친아들처럼 여기지는 않았지만, 선배는 많은 걸 누리고 살 수 있었잖아요. 사람을 살리는 떳떳한 의사로서...!”

“떳떳한 의사...?”


친애하는 선배의 죽음을 무력하게 보고만 있어야하는 상황이 답답해 영진이 울분을 터뜨려 말하던 도중, 그는 처음으로 영진의 말을 끊고 말했다.


“영진아, 나는 의사지만 동시에 조선인이야. 지금 이 땅 위에 있는 조선인들 중에...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을 수 있는 조선인이 있니?”

“...선배.”

“우리가 걸어온, 우리의 양부모들이 만들어준 먼지 한점 없는 그 깨끗한 꽃길은... 모두 핍박받고, 억압받은 조선인들의 피로 닦여진 길이야.”

“!!”


그는 충격받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영진의 눈을 보고 쓰게 웃었다.


“널 비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하지만 영진아... 너도 한번쯤은, 히로시 원장이 만들어준 유리장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가져봐야지 않겠니?”


그는 잔뜩 부운 뺨으로 인해 어눌한 말투로, 그러나 거리낄것 하나 없는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조사는 밤늦게야 끝났다. 영진은 폭발이 일어난 후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사하고 말것도 없었지만 경무국에선 영진이 조선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를 밤늦게까지 붙잡아놓았다. 일본 헌병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영진은 몹시 피곤했다. 영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히로시가 방에서 나왔다.


“영진아.”

“아버지.”

“...피곤하진 않니?”

“네, 아버지 괜찮아요.”


애써 웃는 영진의 시야에 히로시의 방문틈 사이로 일본군의 갑옷이 보였다. 영진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저 히로시 가문의 상징성을 나타낼 뿐이었던 갑옷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 그들이 이 땅을 침략하고 많은 백성들을 베면서 흘렸던 피비린내가 영진의 코끝을 적셨다. 영진은 순간 올라오는 욕지기에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 순간 히로시가 영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영진은 끝내 화장실로 달려가 구역질을 해버렸을 것이다.


“영진아.”

“예?”

“괜찮니? 안색이 창백하구나.”

“...괜찮아요.”


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괜찮지 않았다. 그날 이후 영진은 매일 악몽을 꿨다. 악몽 속에서 자신은 일본군에게 쫓겨 도망을 다녔고, 자신을 지키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군이 쏘는 총알에 맞고 썩은 나무기둥처럼 무너졌다. 초가들이 불타서 연기를 내뿜었고 부모잃은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내 숨어다니다가 마침내 일본군 앞에서 갈길을 잃고 털썩 주저 앉았을때, 부모님을 죽인 그들과 똑같은 군복을 입은 일본군 하나가 다가와서 영진의 손을 잡았다. 모자 챙으로 인해 얼굴에 짧게 진 그늘 속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빛이 선명했다.


영진은 숨을 들이마시며 꿈에서 깼다. 그러나 머리 속에 군인은 얼굴은 깨지지 않았다. 그는 영진이 수십년간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던 히로시였다.


‘먼지 한점 없는 그 깨끗한 꽃길은 모두 핍박받고 억압받은 조선인들의 피로 닦여진 길이야.’


선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영진은 이마에 돋은 땀을 닦았다. 은색의 달빛을 반사한 차가운 땀은 순간 핏물처럼 붉게 변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영진은 그늘속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그늘 아래 숨은 손가락은 그저 검었다.



영진은 선배를 기억했다. 그는 의대생에 어울리지 않게 심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숨진 환자의 손을 잡고 울기도 하고 잔뜩 썩은 장기를 보다못해 뛰쳐나가 구역질을 하기도 하던 이였다.


그런 그가, 온 몸을 흠뻑 적신 자신의 피 앞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조선, 독립운동, 태극기...


영진은 궁금했다. 자신도 그 선배처럼 그 길을 걷게되면 이 손끝에 전해지는 떨림이 멈춰질 수 있을까. 밤마다 찾아오는 끔찍한 악몽이 사라질 수 있을까.


반쪽짜리 일본인인 내가 온전한 조선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영진은 서늘한 다다미를 딛고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히로시가 매일 닦는 갑옷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영진은 갑옷을 정면으로 보며 두 눈을 빛냈다.


나는
그 길을
걸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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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이 마지막회 한화 남았다.
지지난주에 쓰던 상플이라 영진이가 그전까지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는 걸 몰랐다.

이몽이란 드라마에 대해 짧게 감상을 얘기해보자면... 좀 아쉬움이 남는 드라마다. 캐릭터 설정이 너무 좋았는데 올드한 연출과 각본이 아쉬웠다.(개인적인 의견이다.) 의열단원 캐릭터도 좋았지만 일본인이면서 공정한 검사가 되려는 후쿠다, 일본인이면서 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던 미키, 의열단을 도왔지만 생업에 종사하며 삶을 이어갔던 윤세주 등 다양한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특히 이영진의 경우는 사람은 살리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일본인을 죽여야하는 독립운동가, 일본인에 손에 자란 조선인 등 정체성의 혼란과 역할갈등을 훨씬 재밌게 그려나갈 수 있었을텐데 너무 단순하게 처리하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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