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 첫만남 기타

또각또각. 낮은 구두굽이 딱딱한 돌바닥 위를 차분하게 거닐었다. 영진의 발소리는 평소보다 늘어졌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의학원 동기 에스더와의 말다툼이 영진의 머리 속에 잔뜩 부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에 목매는 비겁한 변절자 소리를 들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묻는 에스더의 한마디 물음은 어린 날 뜨거운 물에 손을 덴 것처럼 쓰라렸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잔뜩 숨을 죽인 구두소리가 미약하게 뒤를 따랐다. 영진의 어지러운 머리 속이 물을 끼얹은 듯 단박에 가라앉았다. 대신 귓가에 물먹은 구두소리가 자명종소리처럼 선명해졌다.


진정해, 이영진. 이 상황에서 도망치면 더 수상해보일거야.


영진은 모르는 척 걸었다. 방금 전과 같은 느린 속도였다. 뒤따르는 구두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영진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영진이 밀정이란 걸 알았다면 천천히 뒤를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뒤따르는 이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이의 볼일은 밀정 이영진이 아니라 의사 이영진이란 것이다. 영진은 천천히 걸으며 예상된 습격을 기다렸다.


가로등 불빛이 사이에 낀 건물 그림자에 가려 어두워졌을때, 등뒤로 사람의 온기가 덮쳤다. 왠만한 남자들만큼 큰 키의 영진보다 훨씬 큰 걸로 봐서 습격자는 남자인듯 했다. 습격자는 영진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근처의 구석진 곳으로 영진을 끌고갔다. 가로등 불빛 대신 은은한 달빛이 영진의 검은 눈동자에 비쳤다. 영진은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달빛은 영진과 습격자를 가리지 않았다. 검은 눈썹 아래 얇은 눈동자가 강인하게 빛났다. 영진은 알 수 있었다. 이사람,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다. 부귀와 영화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오로지 민족과 나라만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


영진도 눈치채지 못한 마음의 동요가 그녀의 가슴 아래서 간질이던 그 순간, 영진의 왼쪽 관자놀이 위로 금속의 비정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두껍게 철컥이는 소리로 봐서 소음기를 단 총이었다.


“소리지르면 죽일겁니다.”


남자의 낮은 경고가 들렸다. 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의 입을 막고있던 장갑이 천천히 내려갔다.


“자혜병원 의사죠?”


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총을 맞고 온 남자가 있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까?”

“네.”

“그 남자, 상태가 어떻습니까.”

“죽진 않을 거에요.”

“죽어야합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영진의 말꼬리를 잡아채는 남자의 대답에 영진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 남자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눈 앞의 여자가 자신의 머리 옆을 겨누는 총을 두고도 당돌하게 되묻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원봉이었다. 원봉은 음지에서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영진은 양지에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표정을 읽고 숨기는 데 능숙한 것은 원봉보다는 영진쪽이었다. 영진은 달빛으로 반만 드러난 원봉의 당황을 읽어냈다.


“그 병원 의사면 쥐도 새도 모르게 환자를 죽이기 수월할 겁니다.”

“지금 나보고 그 일을 해달란건가요?”

“동료와 나라를 배신한 잡니다.”

“나는 의사고, 그 사람은 환자에요.”

“조선말을 쓰던데, 당신... 조선인 아니던가?”


불꽃처럼 불타오르는 원봉의 눈빛이 영진의 두 눈을 타고 머리를 찔렀다. 영진은 대답하지 않는 대신 단단히 여문 입매로 변하지 않는 대답을 표현했다.


“아니면, 당신 역시 변절자인가.”


철컥.


영진의 관자놀이 위로 다시 차가운 금속음이 닿았다. 잠깐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영진은 다시 두 눈을 돌려 원봉을 노려봤다. 원봉의 표정에는 경멸이 섞인 것도 같았고, 분노가 섞인 것도 같았다. 동요도 조금 섞인 것 같았는데, 그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양부는 총독부 부원장 히로시 소장이에요. 그러니 나는 조선인으로도, 일본인으로도 살 수 없겠죠.”


끼이익.


방아쇠를 다시 고쳐잡는 소리다. 수 개월의 지독한 밀정 훈련에도 불구하고 생사의 경계에 서게되자 영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러니 나는 그냥 의사에요. 의사는 환자를 살리는 사람이지, 환자를 죽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환자가 변절자라고 해도,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변하는 건 없어요.”

“......그 사람이 입을 열면 여럿이 다칠 겁니다.”


단지 독립투사를 불순분자따위로 부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의사의 신념을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독립투사의 것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믿어 의심치 않는, 절대 변하지 않는 그것.


영진은 방아쉬를 쥔 손에서 힘을 푸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마음은 좀 더 차분해졌다. 이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 그 자의 입에서 나온 파랑새의 정체를 가장 두려워 하는 자는 다름아닌 나라는 것을.


“의사에게 사람의 목숨을 저울에 올릴 권리는 없어요.”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여러 목숨을 거둬봤다. 그러나 병원에서 영진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의사였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 영진은 그 원칙을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목을 죌 수 있는 그 자의 증언이 병실에서 터져나오던 그 순간마저도. 의사는 병원에서 사람을 살려야 한다. 그 원칙이 무너지면, 인간의 장엄한 권리가 무너지고 정의와 불의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그것은 곧 무법천지 아수라장을 의미한다. 독립운동가로서도, 의사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표정을 숨기는데는 누구보다 능숙한 영진이었으나 원봉은 영진의 얼굴에서 적어도 두가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첫번째로, 영진은 일제에 빌붙은 변절자따위가 아니다. 변절자라기엔 너무도 목적없는 순진한 신념의 눈빛과 목소리다. 두번째로, 영진은 신념을 꺾을 여자가 아니다. 이 구석에서 원봉은 벌써 여러번 방아쇠를 만졌다. 총과 칼로는 이 여자의 신념을 꺾을 수 없다. 원봉은 망설이다 총을 내렸다. 알아차린 것처럼 영진이 신념과 실력이 투철한 의사라면, 그것도 조선땅에 세워진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면 살려놔서 나쁠 게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살리는 목숨의 반 이상은 조선인일테니.


“그 마음, 절대 변치 않길 바랍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 마음이 변하는 순간, 의열단의 총구가 당신을 향할테니.”


의열단.


영진은 머리 속에 저장돼있던 인명부를 펼쳤다. 김구가 보여줬고, 화로 속으로 사그라졌던 의열단 명부에 눈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없었다. 유일하게 비워져있던 의열단원의 얼굴. 의열단장 김원봉. 눈 앞의 남자는 김원봉이 틀림없었다.


영진이 그 사실을 새삼 깨닫기 전에 눈 앞에서 남자가 사라졌다. 남자의 체취만 옅게 남은 그 자리에서 영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남자와의 인연은 결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어도, 자신은 분명 그자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걸.


영진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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