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 상하이

 원봉은 익숙한 어둠 속에서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을 내려다봤다. 책장에 빈틈없이 꽂혀진 의학서적들과는 달리 책상 위엔 두어권의 공책들 뿐이었다. 원봉은 차갑게 식은 전구알 밑으로 스탠드 옆에 놓여진 액자를 발견했다. 원봉의 눈이 가늘어졌다. 액자에는 중후하게 웃고있는 군복차림의 히로시와 의사 가운을 입고 환히 웃고있는 영진의 사진이 끼워져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친부녀관계라고 믿을만큼 자연스럽고 친근해보였다.


 이영진, 당신 정체가 뭐야.


 유태준의 거취를 알기 위해 몇달동안 이영진의 뒤를 쫓았다. 집, 병원, 집, 병원. 대부분의 외출은 서점에서 의학서적을 사기 위함이거나 식당에서 모임을 갖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 외부인과의 접촉은 병원 오가는 길에 군것질거리를 사는 것 뿐. 이상할 것은 없어보였다. 멀리서 봤을때는 그랬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현관문이 철컥이는 소리가 들렸다. 원봉은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하다가 소파에 앉았다. 구둣발 소리가 바닥을 타고 흘러왔다. 문이 열리고 영진이 들어왔다. 불을 밝히고 모자를 벗으려던 영진은 앉아있는 불청객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뭐죠?”

 
 원봉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일련의 행동 중에 원봉의 송골매같은 두 눈은 영진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보통 방안에 모르는 사람이 와있으면 누구냐고 먼저 묻죠.”

 “우리, 구면 아니던가요?”

 “구면이라고 아는 사이는 아니지. 난 당신을 알지만 당신은 날 모를텐데.”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어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란 거.”


 어떤 말에도 지지않는 영진의 두 눈을 노려보던 원봉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오늘 김승진을 만났더군요.”


 영진도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영진은 원봉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 허공을 보며 답했다.


 “별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유태준 선생을 만나야합니다.”

 “선배가 어딨는지는 저도 몰라요. 그 사람도 대답해주지 않았구요.”

 “믿을 수 없습니다.”


 원봉의 말에 영진이 고개를 돌려 원봉을 노려봤다. 원봉은 허공에서 그녀의 시선과 맞부딪혔다.


 “당신은 내게 당신이 그저 의사라고 했죠. 하지만 아닙니다. 당신은 평범한 의사가 아니에요.”

 “무슨 말이죠?”

 “김승진을 만난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고 했을때, 당신은 그 사실에 놀라지 않았어요. 내가 미행하는 걸 알고 있었단 소리죠.”


  영진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동요가 일었다. 이번엔 원봉도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영진이 다른 변명거리를 생각하기 전에 원봉은 쏘아붙였다.


 “내가 당신의 뒤를 쫓기 시작하면, 얼마지 않아 당신 발걸음이 멈춥니다. 아마 그 때 겠죠. 뒤따르는 자가 있다는 걸 안 순간이.”

 “기분 탓이겠죠.”


 영진은 부인했다. 물론 원봉의 말이 맞았다. 원봉이 뒤를 쫓기 시작했을때, 영진은 그 미행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자가 원봉이란 것을 알아차린 후에는 굳이 도망칠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에 미행자를 내쫓지 않았을 뿐이었다.


 “김승진씨와의 만남도 억측이에요. 승진씨를 뒤쫓는 사람은 많아요. 당신처럼 태준선배를 만나기 위해서. 당신이 쫓은 사람이 승진씨가 아니라 나였다는 건 좀 의외네요.”


 능청스럽게 맞받아치는 영진을 물끄러미 보던 원봉은 갑자기 영진의 손목을 잡아채 올렸다.


 “그럼 이건 뭐지?”

 “뭐가요?”

 “당신 검지에 박힌 굳은 살. 총을 자주 쓸때 생기는 겁니다. 의사가 칼을 쓸때 생기는 곳이 아니에요.”

 “어릴때부터 아버지와 사냥을 다녔어요.”


 물론 거짓이었다. 영진을 벽장 속에 히나인형처럼 길렀던 히로시는 영진에게 총은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영진의 짐작이 맞다면 원봉이 뒤를 좇은 것은 상해에 온 이후부터였다. 그 전의 행적에 대해선 원봉이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영진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원봉의 굵은 손을 앙칼지게 쳐냈다. 영진은 밀정이었다. 죽어서도 정체서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자가 밀정이다. 한인애국단 중에서도 영진의 정체를 아는 자는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눈 앞의 이 남자, 위험하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까지 당신에게 해야하죠?”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영진은 코웃음쳤다.


 “당신이 믿든 말든 상관없어요.”

 “당신은 평범한 의사가 아닙니다. 검지의 굳은 살이 아니더라도 당신에겐 비밀을 감추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강한 경계심이 느껴져요.”


 원봉은 천천히 영진의 주위를 돌았다. 먹잇감을 관찰하는 맹수처럼. 그리고 마침내 한바퀴를 돌아 영진의 앞에 섰을 때, 원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당신이 일제의 밀정이라면... 내 손으로 당신을 죽이게 될지 모릅니다.”


 긴장감에 강하게 여물고 있던 영진의 입술이 열렸다.


 “어째서 지금 날 죽이지 않죠?”


 반쯤은 떠보는 것이었고 반쯤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다.


 “난 당신의 얼굴을 알고, 일제의 밀정일지도 모르고, 당장이라도 일본 대서관에 달려갈 수 있어요. 어째서 날 살려두는 거죠?”


 원봉의 눈동자가 세찬 바람에 흔들렸다. 그 바람은 영진의 가슴도 훑고 지나갔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남녀는 사실, 그동안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던 신념의 벽 틈으로 새어나오는 청춘의 봄바람에 균형을 잃고 흔들거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원봉도, 영진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이 걸어온 세월과 다짐이 아까워서 쉬이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모든 게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릴 뿐입니다.”

 “......그렇군요.”


 결국 그저 그런 대답들이 오갔다. 아직 원봉은 남자이기 전에 의열단장이었고 영진은 여자이기 전에 밀정이었다. 원봉은 미끈미끈하고 어지러운 방 공기를 피해 창문으로 도망쳤다. 영진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검은 등을 보며 애꿎은 창틀만 괴롭히다 차갑게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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