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 북만주

 원봉은 플랫 캡을 깊이 눌러 썼다. 희뿌연 얼룩이 진 오래된 거울이었지만 원봉의 얼굴을 비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때 문을 열고 남옥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옥의 손에는 종이 네 장이 들려있었다.


 “받아왔니.”


 원봉의 물음에 남옥은 기차표 네장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모두 상해에서 만주로 가는 기차표였다. 원봉이 기차표를 본 것을 확인한 남옥이 방 안 기둥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 여자랑 같이 가도 되겠나? 일본 놈들 밀정일지도 모른다면서.”

 “아니야. 그런거.”


 원봉이 탁자에 놓인 기차표를 주머니에 넣으면서 말했다.


 “청방에 붙잡혀있을때 내 이름을 알았어. 그런데도 일제에 말하지 않았다.”

 “여는 상해 아이가. 청방이 사방에서 눈 밝히고 있는데 우예 행님을 잡아가겠노. 경성에서 밀고할 수도 있다.”


 남옥의 말에 총을 챙기는 원봉의 손이 멈칫거렸다. 원봉의 등을 지켜보고 있던 남옥은 가슴 한구석에 잔뜩 엉켜있는 위화감이 몹시나 불편했다. 이영진이 얽힌 문제에 유독 주저하는 것 같고, 망설이는 것 같고, 고민하는 것 같은 원봉의 모습은 여태껏 남옥이 알고일던 원봉의 것이 아니었다.


 “행님.”


 남옥이 넌지시 원봉을 불렀다. 원봉이 고개를 돌려 남옥을 봤다. 남옥은 검지로 모자에 눌려있던 이마를 긁적긁적 긁으며 말했다.


 “내는 행님이 얼른 결혼했으면 좋겠다.”

 “무슨 소리야? 생뚱맞게.”

 “행님도 어딘가에는 편안하게 마음 둘 구석이 있어야하지 않겠나.”


 간지러운 소리를 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남옥을 원봉은 가만히 지켜봤다.


 “형수님은 우리처럼 독립운동같은 것도 안했으면 좋겠고, 사상같은 거에 얽매이는 사람도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뭐 행님이 선택한 여자라면 우야겠노.”

 “자꾸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 할래? 본론부터 말해.”

 “일제 부역자는 아니다.”


 더이상 남옥은 간지럽고 민망한 표정도, 장난기어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남옥은 경고를 섞은 단호한 눈빛이었다. 원봉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이영진, 그 여자... 일제의 밀정일 수도 있고, 일제의 부역자일 수도 있다. 행님, 그 여자 가까이 하지 마라.”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마라.”

 “행님. 내가 행님 대신 죽어줄 수도 있고, 행님 대신 누군가를 죽여줄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행님을 쏘는 건, 싫다.”


 남옥의 말이 끝나자 원봉은 저벅저벅 걸어 남옥의 곁으로 갔다. 그는 두꺼운 외투 위로 남옥의 윗가슴을 툭툭쳤다.


 “그럴 일 없어. 네가 나 대신 죽을 일도, 나 대신 죽일 일도, 나를 쏠 일도.”


 짧게 남옥을 내려본 원봉은 남옥을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갔다. 남겨진 남옥은 다시 이마를 긁적이고 짧은 한숨을 내뱉은 후 원봉을 따라 방을 나갔다.




 -



 만주에 간 영진은 태준에게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년 전 독립운동을 시작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임정에 연결시켜준 자가 바로 태준이었기때문이었다. 태준은 모닥불에 데운 아이락을 영진에게 내밀었다.


 “몽골에 있을 때 배운거야. 먹어봐.”


 영진은 아이락을 받아들고 홀짝였다. 시큼한 맛에 영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영진의 표정을 본 태준이 하하 웃었다. 영진에게 남은 아이락을 받아들고 황차를 내민 태준이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김단장은 네 정체에 대해 모르는 것 같던데.”

 “밀정의 정체는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죠.”

 “사실 얼마 못가서 포기할 줄 알았어. 넌 다른 동기들과는 다르게 가진게 많았으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니라는 걸 알았죠. 선배들 덕분에.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히로시 소장이 만들어준 것이었어요. 히로시 소장이 날 파양하겠다고 말하면 하루 아침에라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겠죠. 처음부터 내가 가진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눈빛이... 강해졌다.”


 모닥불을 비춘 영진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태준이 말했다. 영진은 태준을 돌아봤다.


 “좋아보이나요?”

 “...모르겠다. 우리의 땅이 우리의 것이었더라면, 너는 그런 눈빛을 갖지 않아도 됐겠지. 네가 투사의 눈빛을 갖게 된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좋아보이든, 나빠보이든 내 선택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던 의사시절로 돌아가는 건 끔찍해요.”


 가만히 보던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영진이 태준에게 말을 걸 차례였다.


 “만주는 위험해요. 상해로 가요. 임정에서 선배의 식구들을 보호할 거에요.”

 “만주에는 아직 치료가 필요한 조선인들이 남아있어.”

 “선배가 코민테른 자금을 맡고 있다는 걸 알아요.”


 알려질대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구 선생을 만나보세요. 선생은 선배를 통해 자금을 분배하고 단체들간의 반목을 해소할 생각을 하고 계세요.”


 영진의 말에 태준은 고민에 잠겼다. 영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조선은 힘이 약해요. 그런 조선이 일본에 맞서 싸우려면 하나된 마음이 필요해요. 사분오열 흩어져서는 무엇도 할 수 없어요.”

 
 태준은 고개를 숙여 손에 쥔 아이락을 내려다봤다. 내내 엉켜왔던 머리 속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두 눈을 감고 고민에 빠져있던 태준의 손에 갑자기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태준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체온의 주인을 돌아봤다.


 “김구 선생과 약속했어요. 무력으로 자금을 빼앗는 일도, 독자적인 자금집행도 없을거에요.”

 “...영진아.”

 “이년 전, 내가 선배를 믿었듯이 선배도 나를 믿어줘요.”


 이년 전보다 훌쩍 커버린 눈빛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영진을 보고, 태준은 복잡해진 마음을 숨기며 차분한 미소로 영진의 손을 고쳐잡았다. 영진의 손을 재차 토닥인 태준은 말없이 일어나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영진은 태준의 빈 자리만 내려다보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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