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 북만주(2)

   닭똥이 섞인 볏짚을 옆으로 밀어넣고, 마자르가 숨겨진 나무상자를 꺼내 마루에 내려놓았다. 묵직하게 나무 으깨지는 소리가 내용물의 성질을 짐작할 수 있게했다. 안에는 반짝이는 금붙이가 가득이었다. 금괴에서 빛나는 조국의 미래를 넘겨짚는 대신에, 영진은 만주에 남겨질 태준의 딸아이를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그때, 철컥이는 소리가 귀 뒤에서 들렸다. 영진은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눈 앞에 동그란 총구를 내밀고 있는 이는 원봉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혼돈과 당황스러움으로 가득찼다. 남옥은 복잡한 심사를 제쳐두고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영진에게 겨눴다. 승진이 당황과 분노로 총구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영진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무슨 짓입니까?!”


 승진의 외침에도 원봉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는 당신 정체를 알아야겠습니다. 당신은 관동군 주둔지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사람에게 총을 쐈어요. 그건 절대로 사냥만으로 총을 쏴본 자가 할 수 있는게 아니야. 당신은 이전에도 사람에게 총을 쏴본 적이 있는 겁니다.”

 “확실해질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하지만 이제 기다릴 수 없어요. 당신이 조국독립에 해가 되는 존재라면, 당신의 손에 코민테른 자금이 들어가게 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해요. 당신, 누굽니까?”

“총으론 내게 대답을 들을 수 없어요. 이미 한번 경험해봤을텐데.”


 영진은 말하며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총구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에 남옥은 되려 당황해서 총구가 흔들렸지만 원봉은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했다.


 “이건 협박도 아니고 경고도 아니야. 이번엔 정말로, 당길겁니다.”


 원봉은 도리어 한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덕분에 총구와 영진은 더 가까워졌다. 이제 총구와 영진 사이 주먹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 할정도로 가까웠다.


 “코민테른 자금, 이건 그냥 돈이 아닙니다. 이 돈이 일제의 손에 들어가면 일본의 군자금으로 쓰이겠지. 동지를 죽이는 총알을 사고, 대한의 땅을 짓밟은 탱크를 사고! 우리가 온 후 유태준 선생이 죽었어. 내겐, 우리에겐! 유태준 선생의 자금이 올바르게 쓰이게할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말해요, 당신 누구야!”

 “김구의 밀정, 파랑새.”


 너무나 단숨에 스스로 밝히는 영진의 정체에 원봉은 영진의 말을 잡아채지 못했다.


 “뭐?”

 “김구의 밀정이 경성에 있다. 조선인 여의사, 그게 바로 나라구요. 이영진.”


 영진을 그저 태준의 지인으로만 알았던 승진도, 영진을 총구로 겨누고 있던 남옥도 입이 떡 벌어졌다. 김구의 밀정을 김에스더로 알고 있었던 원봉도 자신의 귀를 의심하긴 마찬가지였다.


 “똑바로 말해요. 어느 소속의 무슨 지위입니까.”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뭐라구?”

 “내가 이 총이 무서워서 정체를 밝혔다고 생각해요?”


 영진은 총신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이번에는 원봉도 정말로 당황했다. 그러나 영진은 거침이 없었다.


 “내게도, 아니, 임정에도 코민테른 자금은 필요해요. 내가 정체를 밝힌 이유는 코민테른 자금을 가져가기 위함이라구요. 김구 선생의 밀정이란 것 이상은 밝힐 수 없어요. 내게도 내 조직을 보호할 책임이란 게 있어요.”


 이번에는 남옥이 빈정이 상해 나섰다.


 “우리가 못미더운 겁니까?”


 영진은 남옥을 돌아봤다.


 “어떻게 믿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되는 시대인데.”

 “우리 행님은 약산 김원봉이야! 의열단장 김원봉!”

 “내겐 약산 김원봉의 이름보다 내 조직의 안위가 더 중요해요!”


 영진은 원봉에게 그랬듯이 남옥에게도 결코 지지 않았다. 영진의 기세에 남옥이 할말을 잃자 영진은 원봉을 돌아봤다.


 “내 정체가 궁금하면, 김구 선생에게 물어봐요. 그 분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내 정체를 알 수 없을 거에요. 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쏘시던지.”


 영진은 총신을 밀어 쳐냈다. 그녀는 원봉을 지나쳐 걸어 멀리 도망가있던 태준의 딸에게 걸어갔다. 어른들의 마찰에 두려워 떨고 있던 태준의 딸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있던 원봉은 총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기세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던 원봉이 그녀의 앞에서면 번번이 지고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총신을 집어넣고 자금을 챙긴 뒤에도 한참 후였다.





 눈이 내리는 만주역 앞. 검은 그림자 수 개가 역 앞을 서성였다. 영진도 그들 사이에서 묵묵히 추위를 참아가며 열차를 기다렸다. 그 옆으로 크고 높은 그림자가 와서 섰다. 영진의 옆에 서있던 마자르는 원봉의 눈치에 쭈뼛쭈뼛 뒷걸음질로 남옥의 곁에 걸어갔다. 원봉의 기척에 영진이 그를 돌아봤다. 추위에 하얗게 질린 영진의 얼굴에 볼만은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자금은 김구 선생께 잘 전해주겠습니다.”

 “고마워요. 상해까지 들려야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말랑말랑한 대화가 오갔음에도 남은 공기는 서먹서먹했다. 원봉은 목구멍 아래에서 간질거리는 민망함에 애꿎은 턱밑만 벅벅 긁다 손을 내렸다.


 “흠흠!”


 원봉의 헛기침에 영진도 다시 원봉을 돌아봤다.


 “유태준 선생의 집 앞에서 총 들이댄 거... 미안합니다.”


 무뚝뚝한 원봉의 입에서 나온 사과에 영진은 대꾸도 못하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영진은 풋 하고 웃었다. 그녀의 뒤를 쫓을때 종종 봤던 웃음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이는 처음이었다. 원봉의 얼굴이 단번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오, 왜 웃습니까?”

 “그쪽이 날 죽이려던게 한두번이에요? 왜 그것만 사과하세요?”

 “그, 그건...”


 원봉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자 영진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추측하는 척 장난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때는 정말 죽이려고 해서?”


 원봉은 대답하지 못했다. 영진도, 원봉도 알고 있었다. 그 순간엔 영진의 답이 아니었다면 원봉은 정말로 영진을 죽였을 것이다. 원봉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 돈은 많은 독립투사들이 피땀을 흘려 얻어낸 자금입니다. 나는... 그 신념들을 배신할 권리가 없어요.”


 미안하고 어쩔 수 없는 마음에 눈을 내리깐 원봉의 얼굴을 본 영진은 쓰게 웃었다. 원봉 뿐만 아니다. 영진 역시 원봉의 상황이었다면 총을 겨눴을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눈치챈 지금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마음이 가는 사람도 총을 겨눌 수 있어야 하는 비극적인 시대가 지금의 시대이다. 그이에게 이끌리는 자력에 몸을 맡기기 전에 시험하고,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는 곳이 지금의 조선이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내게 총을 겨눈건 당신이 아니니까.”


 영진의 말에 원봉이 영진과 눈을 마주쳤다. 영진은 원봉을 이해했다.


 “내게 총을 겨눈건 시대에요.”


 영진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원봉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진이 먼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시대지만, 오늘도 살아가야 하니까.”


 원봉은 영진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봤다. 원봉은 영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악수 대신 원봉은 영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덕분에 영진은 예상치 못하게 원봉의 품으로 안길뻔 했다. 원봉이 직전에 영진의 몸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영진은 자연스레 원봉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원봉은 영진의 귀 바로 옆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원봉은 영진의 상체에서 떨어져 깊게 웃었다. 영진의 웃음이 달밤에 피는 벗꽃같다면, 원봉의 웃음은 그 벗꽃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같았다. 바로 눈 앞에서 깊어져가는 원봉의 웃음에 영진도 화답하듯 활짝 미소를 피었다.


 “경성에서 다시 봐요.”


 영진이 짧게 말했다.


 소복 소복 쌓여가는 눈송이 사이로, 원봉은 근원모를 꽃향기를 맡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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