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 (들통나다)

 그날은 평온한 일상 중 하나였다. 두시간 후 그 집안에 두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대면하게 될지는 상상조차 못할, 그런 날이었다. 영진은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었다. 히로시 원장과 현옥 아주머니 사이에서 여느때처럼 깔깔 웃다가, 환자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방에 들어가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근처를 지나가던 영진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마루입니다. 사령관님을 바꿔주십시오.”


 마루의 말에 영진의 등에 섬뜩한 긴장이 섰다. 마루의 목소리가 누구에게 뒤쫓긴 사람처럼 다급했기 때문이었다. 영진은 걸어오는 히로시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그리곤 방에 들어가는 척 귀를 세웠다.


 “뭐? 알았어. 남대문통... 거기 숨어있었군. 바로 가지. 1개 소대를 먼저 보내.”


 대화 내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히로시의 말에 영진은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남대문통이라면 의열단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다. 어쩌다 들킨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을 피신시키는 게 먼저였다. 영진은 군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방에 들어가는 히로시를 확인하고 서둘러 방 안으로 뛰어갔다.


 남장을 하고 플랫 캡을 깊숙이 눌러쓴 영진은 창문을 통해 집을 빠져나와 지름길을 가로질렀다. 중간에 약방에 들려서 전화로 위기를 알릴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전화가 한번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약방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초가를 넘어가며, 주차된 차 지붕 위를 뛰어넘어 영진은 간발의 차로 남대문통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영진은 저녁을 먹으려던 의열단 틈으로 뛰어내렸다. 남자의 형체에서 영진의 얼굴을 발견한 원봉이 반가움에 웃었다.


 “영진씨.”

 “도망쳐요.”


 영진의 짧은 한마디에 분주한 단원들의 몸놀림이 멈췄다.


 “지금 헌병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국을 담은 질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마자르는 무기와 폭탄을 부리나케 챙겼고 남옥은 영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총을 챙겨 문턱에 몸을 숨기며 망을 봤다. 원봉도 남옥과 함께 망을 보려다가 아직 마당 한가운데 서있는 영진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뭐해요, 어서 도망쳐요. 당신, 아직 밀정이잖아.”


 원봉의 말에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이 장독대를 디딤삼아 뛰어오르려는 찰나, 남옥이 소리쳤다.


 “안돼!”


 그 순간, 남옥의 발치에서 나무 파편이 튀기며 총소리가 났다. 원봉은 영진의 팔뚝을 잡아 몸을 숨겼다. 주변을 포위하려던 헌병대의 계획은 남옥의 외침에 놀란 헌병 하나가 총을 쏘면서 실패했다. 물론, 헌병이 총을 쏘지 않았어도 남옥의 매같은 눈이 포위를 눈치챘었겠지만. 원봉은 마자르가 던진 권총 하나를 챙겨 영진에게 쥐여줬다.


 “먼저 가요. 뒷문은 아직 에워싸지 못했습니다.”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은 마당을 쏘아대는 헌병들의 총알을 피해 뒷문으로 달렸다. 마자르와 정임도 뒷문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양장점도 드러났나요?”

 “그것까진 알지 못했어요. 평소에 모이는 곳들은 위험해요. 일단...”


 영진은 짧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고민을 오래 유지하기에는 총소리가 귓가를 쉴 새 없이 때리고 있었다.


 “김단장과 만났던 정자 근처 다리가 있어요. 알아요?”


 정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임은 폭탄과 총기를 챙긴 마자르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밀정인 영진을 보내고 자신은 원봉과 남옥을 기다렸다.


 여름이 아직 먼 늦겨울의 밤이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린 후였다. 근거지는 포위하지 못했어도 남대문 일대는 통제에 성공했는지 도로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진은 잔뜩 긴장한채 방아쇠를 매만졌다. 그때, 총소리와 함께 영진의 다리 근처에서 성질 모를 것들의 파편이 튀었다. 영진은 재빨리 모서리 뒤로 몸을 피했다. 모서리 너머로 계속해서 총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었다. 영진은 심호흡을 하고 재빠르게 몸을 돌려 적을 겨눴다.


 몇차례의 사격을 했으나 어두운 밤이라 상대는 끄떡없었다. 영진은 다시 모서리 뒤로 숨었다.


 “포기해! 이쪽은 여럿이다!”


 그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모서리 너머에서 들려왔다. 영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자리에서 마주쳐서는 안될 사람이다. 아버지와 딸로, 평화로운 집 안에서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다. 영진은 권총의 남은 총알 수를 셌다.


 히로시는 군의관출신이었기에 분명 뛰어난 사격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령관이 대동할 군인들은 영진보단 총에 익숙한 자들일 것이었다. 영진은 직감했다. 밀정의 역할은 이곳에서 끝났다. 영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아 심호흡을 했다.


 “투항하면 살려준다! 총 버리고 투항해!”


 히로시의 외침에 영진은 자명종 소리라도 들은 듯 눈을 번쩍 떴다. 영진은 다시 적들을 겨눠 총을 쐈다. 이쪽이 수에서 밀릴때 하나 유리한 점은, 영진에겐 과녁이 많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두 어명의 군인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빗발치는 총탄이었다. 그러고보니 왼쪽 팔뚝이 뜨거운 것이, 총알이 스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영진은 등 뒤로 벽이 총알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을 느끼면서도 고민했다. 이 자리에서 버티는 시간이 더 길까, 히로시 앞에 등장하여 그의 발을 붙잡아두는 것이 더 길까. 영진은 후자를 택했다. 영진은 골목길 위로 총을 던졌다. 그제야 일군의 총질이 멈췄다. 영진은 히로시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도록 플랫캡을 벗어던졌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영진은 두 손을 들고 골목으로 나왔다. 인영이 남자의 것이라고 확신했던 히로시는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의아해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달빛 아래 비친 영진의 얼굴에 경악으로 변했다.


 “...ㄴ, 니가 왜 여기에...”


 영진은 대답 없이 천천히 걸었다. 히로시는 단박에 얼어붙었다. 배신감과 분노, 현실도피가 영진의 걸음 하나하나에 히로시의 몸 안을 철저하게 물들였다.


 “말해,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어째서?!”


 더이상 걸을 길이 없는 영진은 히로시의 바로 앞에서 차갑게 말했다.


 “두 눈으로 확인하셨으면서,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영진의 말에 히로시는 이성을 잃고 총을 들어 영진을 겨눴다. 히로시가 진심으로 영진을 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히로시의 가슴에 피가 터지면서 그가 오른 쪽으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썩은 고목나무처럼 쓰러지는 양부를 눈 앞에서 확인한 영진은 방금 전 히로시가 그랬듯이 얼어붙었다. 주변에서 우왕좌왕 총질을 해대던 헌병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양측에서 총알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영진은 그들을 살필 정신이 없었다. 핏물이 잔뜩 물든 황색의 군복을 입은 양부가 발밑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영진은 판단조차 하지 못하고 셔츠 끝을 찢어 상처를 막았다. 히로시는 그런 영진을 노려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모든 헌병들이 쓰러지고 어둠 속에서 원봉과 남옥이 뛰쳐나왔다. 원봉이 상처를 막고있는 영진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영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처를 막는 손이 빠지면 히로시는 죽는다.


 “지금 가야합니다!”


 히로시의 얼굴을 확인한 원봉이 재차 영진의 몸을 일으키려 했다. 영진도 알고 있었다. 가야한다라는 것을. 지금 히로시를 죽이지 않으면 영진이 죽는다는 것을. 그러나 갈 수 없었다. 히로시가 시체가 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영진을 외면하지 못했듯이, 영진도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가세요.”

 “영진씨!”

 “...걱정마요. 꼭, 따라갈게요.”

 “행님!!”


 남옥의 재촉이 들렸지만 원봉은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영진은 그를 보내야했다. 그마저 히로시의 옆에 붙잡아둘 순 없다.


 “가요. 단원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단원들을 거론하자, 그제야 원봉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원봉은 끝까지 영진의 손끝을 놓지 못했다. 영진은 원봉을 향해 애써 웃었다.


 “당신을 믿어요.”


 영진은 원봉의 두 눈을 보며 덧붙였다.


 “나를 믿죠?”

 
 원봉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봉은 영진에게 말했다.


 “꼭... 살아야합니다.”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다짐은 받지 못했다.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절실한 소망이었다.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봉은 재촉하는 남옥과 함께 골목을 빠져나갔다.



 히로시의 남은 숨이 모두 빠져나가기 전에 일군들이 사령관을 찾아왔다. 누가봐도 독립운동가의 옷차림을 하고 있던 영진에게 총구가 겨눠졌다. 그 중 하나는 경악한채 병원차를 부른 마루의 것이었다. 영진은 온 일군의 경계 속에서 히로시와 함께 병원차에 탔다. 그리고 총독부 병원에 도착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침착한 얼굴로 수술을 집도했다. 같이 수술을 진행한 의료진들 중에서도 가장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의식을 잃은 히로시를 중환자실로 보내고, 영진은 수술 가운을 벗어내렸다. 세탁실로 보내는 가마니에 가운을 집어넣으며, 영진은 이 수술가운이 일본인 의사로 살았던 마지막 흔적임을 알아차렸다.


 영진이 수술실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기댔던 벽면에서 등을 떼고 영진에게 걸어왔다. 가장 선두에 선 두 인물의 표정차이은 너무도 확연했다.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인한 마쓰우라의 환희와 가장 믿었던 사람의 본모습을 확인한 후쿠다의 절망. 영진에게는 둘 중 어느 사람의 표정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나마 후쿠다의 절망보다는 마쓰우라의 환희쪽이 더 낫다고 생각한 영진에게는 감사하게도, 마쓰우라가 후쿠다를 제치고 영진의 앞에 섰다.


 “이영진씨. 의열단의 밀정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의외의 사람이 별다른 대꾸 없이 체포를 받아들이려던 영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직 영진을 히로시의 양딸이자 자신이 보살펴야할 아가씨로 인식하고 있던 마루는 이 체포를 두고볼 수 없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이거 왜 이래. 의열단 체포작전이 히로시 사령관에게 전해졌고 은거지에 있어야할 의열단은 뿔뿔이 흩어졌어. 대신 이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지. 틀림없는 밀정인데, 밀정을 경무국에서 체포하는게 무슨 문제가 되지?”


 그의 말에도 마루가 비켜서지 않자 마쓰우라는 총을 꺼내들어 마루에게 겨눴다. 순식간에 헌병대와 경무국 형사들이 서로를 두고 총구를 맞댔다. 마쓰우라가 비열하게 웃으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가 다치면 헌병대에서 책임질건가. 명분도 없이 용의자를 지키려다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물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은 헌병대였다. 마쓰우라의 말처럼 영진은 의심할바 없는 밀정이었고, 그 혐의를 조금이라고 부인해줄 수 있는 히로시는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있다. 마루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링 위에 두고 싸우고 있는 두 세력 사이에서, 그저 어찌돼든 상관없다는 듯 방관하고 있던 영진은 저항없이 형사들의 체포에 응했다. 비굴함 없이 걸어가는 영진의 뒷모습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빈틈없이 그녀를 지켰던 마루와 후쿠다 두 남자가 힘없이 지켜봤다.


 헌병대의 결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경무국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법무국은 끼어들 틈도 없었다. 히로시가 깨어나기 전에 승부를 봐야했던 경무국 형사들은 고등계 분실에서 강도높은 고문으로 영진을 괴롭혔다. 그 결과로 분실에 들어온지 하루만에 영진의 다리뼈와 갈비뼈 두대가 부러졌다.


 그러나 영진은 비명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왜 그 자리에 있었냐고 묻는 마쓰우라에겐, 아버지의 통화를 엿듣고 걱정이 돼서 따라갔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히로시가 깨어나면 모래성처럼 부서질 대답이었지만, 영진은 히로시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영진의 혐의를 부인할 것이라는데 승부를 걸었다. 그 후에 히로시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 거란 건 차후의 문제였다.



-


 며칠이 지났다. 영진에게 버틸 힘이 다 떨어져가던 그 절묘한 순간에 히로시가 눈을 떴다. 마루에게 모든 일을 보고받은 히로시의 대답은 간결했다.


 “데려와.”


 마루는 말을 붙이는 대신 명령을 충실히 행동으로 옮겼다. 한개 소대병력을 가지고 경무국에 들이친 마루는 분실에 갇혀있던 영진을 꺼내왔다. 마쓰우라를 위시한 형사들이 그들 앞을 가로 막았으나 마루는 개의치 않았다.


 “히로시 사령관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을 꺾으려면, 적어도 총독께서 직접 오셔야 할겁니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해!”


 지나가려는 마루의 어깨를 붙잡은 마쓰우라를 마루는 차갑게 응대했다.


 “지금 조선은 사령관님의 세력하에 있습니다. 경부 뿐만 아니라, 이 경무국 전체, 처자의 명운 전체를 걸 수 있겠습니까?”


 마루의 응대에 천하의 마쓰우라 손끝이 빳빳하게 굳었다. 굳어버린 마쓰우라의 팔뚝을 쳐낸 마루는 영진을 데리고 경무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히로시는 눈 앞의 엉망이 된 영진을 마주했다. 부러진 갈비뼈로 인해 호흡이 불안정한 영진에게선 바람이 빠지는 듯한 쇳소리가 났다. 그러나 피와 멍으로 부풀어진 눈꺼풀 아래에는 투사의 눈이 형형했다. 히로시는 너무나도 당당한 영진의 눈빛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일본에서 살았던 시절, 영진이 조선인이라고 학교에서 구타를 당해왔던 적이 있었다. 그 순간 히로시는 두 눈이 뒤집혀 회초리를 꺼내들고 영진을 괴롭힌 여학생들 집으로 뛰어들어갔었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누워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을 마주한 히로시는 경무국에 뛰쳐갈 엄두가 들지 않았다. 영진은 도저히 핍박당하는 이의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히로시로선 처음보는 영진의 눈빛이었다.


 “대체 왜 그랬니.”

 “잃어버렸던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요.”


 영진의 대답에 히로시가 헛웃음쳤다.


 “나라라... 넌 겨우 6년간 조선인이었고 30년동안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왜 없어진 나라의 민족을 자처하는거냐.”

 “명부에 일본인이라고 쓰여졌다고 해서 제가 조선인이란 사실이 바뀌진 않아요. 이 땅의 이름이 잠시 일본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은 여전히 조선인 것처럼요.”


 당돌한 영진의 대답에 히로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난 죽을 운명이었던 널 살려줬어! 내가 어린 널 살리지 않았다면 넌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넌 그 순간부터 일본인으로 태어난거였어!”

 “죽을 운명이요? 그런 건 누가 정하는데요? 당신에겐 내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어요.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이 죽은 것도 운명따위가 아니라 일본의 침략때문이었죠.”

 
 ‘당신’이라고 했다. 히로시는 눈 앞에 있는 영진이 정말로 자신이 딸이라고 믿었던 그 어린 꼬마아이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영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원장님은 어린 절 살렸고, 저는 원장님의 목숨을 구했어요. 그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서 원점으로 되돌아온거죠. 침략자 일본과 피해자 조선으로.”


 둘 사이에 삭막한 적막이 남았다. 그 순간, 히로시는 깨달았다. 이제 그들에게 부녀관계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었다. 히로시는 병원 이불을 주름잡았다. 분노, 실망, 아픔이 동시에 밀려와 히로시의 손등에 굵은 핏대를 세웠다. 히로시는 마지막 경고조로 말했다.


 “널 사랑했다.”


 내내 망설임없던 영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히로시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뭐라 비난하든... 나는 널 내 딸로 사랑했어.”

 “...저도, 원장님을 사랑했다면 믿으실건가요?”


 영진의 한쪽 눈 밑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영진의 눈물과 고백에 히로시의 마음이 덜컥 떨어졌다.


 “제가 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건... 당신이... 내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 모든 불행의 씨앗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거였어요.”


 처음 자전거를 배웠을 때 넘어지지 않도록 안장을 잡아준 사람도, 떨리는 마음으로 고등학교 교정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때 손을 잡아준 사람도, 처음 병원에 출근했을 때 새하얀 가운을 손수 입혀준 사람도, 첫 사망자를 허망하게 보냈을 때 병원 구석에 쪼그려앉아 눈물을 쏟아내던 자신의 어깨를 말 없이 토닥여준 사람도 모두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사람이었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악몽으로 물들인 사람이었다. 사랑했던 부모와, 가족같던 친구들을 죽이도록 지시한 사람이었다. 친했던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죽음의 배후에 있던 사람이었다. 조선인의 피맺힌 울음을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영진은 끔찍했다. 눈 앞의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야 할지, 경멸을 느껴야 할지, 분노를 느껴야 할지, 애정을 느껴야 할지 몰아지은 감정의 폭풍은 영진의 가슴을 옥죄였다. 왼쪽 눈을 짓누르는 피멍의 붓기보다 부러진 오른 다리의 고통보다 흉부의 압박으로 숨쉴때마다 폐를 찔러오는 고통보다, 영진은 히로시의 부정을 마주하는 이 감정이 더 아팠다.
 

  방금 전과는 다른 성질의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그들은 그 침묵 속에서 아픔과 슬픔의 이별을 참아냈다. 마침내 히로시는 마루를 불러서 짧게 명령했다.


 “내보내.”


 그것이 끝이었다.




 히로시는 허공을 짚었다. 지난 세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력을 쌓았다. 그리고 그 끝 어드메엔 분명 영진이 있었다. 조선인의 핏줄을 가진 내 아이. 아내에 이어 본인까지 숨을 거두면 천지간에 기댈 곳 하나 없는 불쌍한 아이. 그 아이가 버려질까 두려워 누구도 그 아이를 함부러 대할 수 없는 세력을 쌓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을 거부했다. 아니, 거부로도 모자라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부류를 제일 경멸하고 비난할 단체에 들어갔다. 제 손으로. 히로시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찌 아니 우스운가.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는데.



 영진은 며칠간 총독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동안 경무국에서 영진을 찾았다. 그것도 켄타가 직접. 그러나 켄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영진이 아니라 히로시였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장 돌려놔!”


 관성의 법칙처럼, 히로시는 아직 영진이 제 유리창을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죽이든 살리든 제 손안에 있어야했다.


 “그 아이는 내가 걱정되서 따라온 것 뿐이야.”

 “이봐, 히로시. 지금 장난해?”

 “지금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나.”


 얼음처럼 서늘한 히로시의 기운에 켄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봐, 켄타. 이 히로시의 딸을 잡아가려면, 그딴 정황증거 말고 빼도박도 못한 물증을 가져와.”

 “자네 정말 왜 이래? 그 아인 밀정이야, 이젠 자네도 알잖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차갑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히로시의 앞에서 켄타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일본은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법대신 칼과 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있는 건 일본 장성 히로시였고 켄타로선 거기에 맞설 무기가 없었다.


모든 치료를 끝낸 히로시는 황색 군복으로 갈아입으며 환복을 돕던 마루에게 물었다.


 “영진이는?”

 “아가씨께서도 거의 치료가 끝나셨습니다.”


 지난 밤동안 몇번이나 영진을 죽이려는 꿈을 꿨다. 그 수많은 밤동안 히로시는 한번도 영진을 죽이지 못했다.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의 손은 끝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히로시는 군복의 주름을 펴며 말했다.


 “당장 구라파든, 미국이든 감시자와 같이 영진이 보내.”


 히로시의 명령에 마루가 고개를 들어 히로시를 쳐다봤다. 히로시는 방을 나서기 전에 짧게 말했다.


 “다신 내 눈에 띄지 않게.”


  방을 빠져나가는 히로시의 등 뒤로 마루가 깊숙이 상체를 숙였다.




 그날 오후, 히로시는 보고서 한장을 분노에 차서 잘게 찢었다. 총독부에 정식으로 올라가는 문서는 아니었다. 잘게 찢어진 그 문서에는 정갈한 글씨로, 제물포로 향하던 헌병대 차 하나가 불령선인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적혀있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